문재인 대통령이 며칠 전 참모들에게 ‘정말 하루를 더 여기서(청와대) 있고 싶은 대통령이 누가 있을까요’라고 했다 한다. 묻는 듯한 말투지만 사실은 혼자 묻고 혼자 답하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이었을 것이다. 대통령도 결국 모든 전임자(前任者)들이 섰던 그 자리로 돌아왔다. 30년 전 옛일이 떠올랐다.

2018년 2월 5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장(위 사진)에 고 신영복 선생의 '춘풍추상(春風秋霜)' 이란 글이 걸려 있다./연합뉴스

1993년 2월 15일 퇴임을 열흘 앞둔 노태우 대통령을 회견(會見)하러 청와대에 들어갔다. 얼굴을 마주하고 적지 않게 놀랐다.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대통령은 성품(性品)대로 미리 준비한 답변 문안을 1시간 넘게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읽어나갔다. 가뜩이나 높은 집무실 천장은 더 높아 보였고 방은 더 넓어 보였고 대통령은 더 작아 보였다.

2주일 지난 3월 4일 갓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을 회견했다. 같은 집무실이었고 의자와 탁자만 새로 들였을 뿐인데도 얼마 전 휑하던 방이 꽉 찬 느낌이었다. 본래 기(氣)가 센 대통령이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출발선에 선 대통령 기운이었다. 5년 후 김 대통령은 집무실 창틀 곁에 서서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는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물끄러미’보다 ‘우두커니’가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대통령 권력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상징하는 사진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다음 해인 2018년 2월 수석 비서관과 보좌관 회의가 열리는 청와대 소회의실에 ‘춘풍추상(春風秋霜)’이라는 족자를 내다 걸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같이 부드럽게, 자신에 대해서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라는 뜻이다. 글씨는 통혁당 사건으로 오래 복역(服役) 했던 신영복 씨가 썼다. 말이 쉽지 보통 사람은 넘보기도 힘든 경지(境地)다. 보통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는 ‘나와 우리 편’ ‘남과 다른 편’을 가르지 않고 같은 법과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사실 이 원칙을 지키는 것도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다.

대통령과 대통령 사람들은 ‘춘풍추상’이란 글귀가 내려다보는 회의실에서 ‘남과 다른 편’에게 가을 서리보다 모질고 각박(刻薄)한 결정을 수도 없이 내렸다. 뜻이 거꾸로 뒤집힌 ‘춘풍추상’은 문 정부 5년의 블랙박스를 여는 열쇠다. 4년 가까이 계속돼 여러 목숨을 앗아간 적폐 청산의 지도 원리가 ‘춘풍추상’이다. 대통령은 얼마 전 3·1절 기념사에서 ‘우리나라 최초 민주 정부는 김대중 정부’라고 했다. 크게는 대한민국 역사, 짧게는 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 역사를 이렇게 훼손하고 잘라낸 가위도 ‘춘풍추상’이다. 영어 사전에도 ‘내로남불’이란 단어가 올랐다지만 문재인 시대를 휩쓸어간 흙탕물에서 위선(僞善)을 빼놓을 수 없다. ‘춘풍추상’ 액자를 거꾸로 걸면 위선이 된다. 문재인 시대는 위선자 열전(列傳)을 써도 될 만큼 넉넉한 소재를 제공했다.

‘다른 편에게 서릿발 내리듯, 우리 편에게 봄바람 불듯’은 사실 자해(自害) 행위나 다름없다. 관용을 남에게 베푸는 자선(慈善)이라 생각하면 착각이다. 관용을 베푼 사람에게만 관용의 혜택이 돌아간다. 그런 뜻에서 관용은 일종의 보험이고 신사협정(紳士協定)이다. 대통령은 보험에 들지도 않았고 신사협정을 지키지도 않았다.

88년 이후 역대 대통령은 나라가 다음 단계로 딛고 올라설 계단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업적은 자기 진영(陣營)이란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진영의 경계선을 넘어섰을 때 이뤄졌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정책·김영삼 대통령의 실명제·김대중 대통령의 한-일 신시대 개막 선언 등은 지지층의 생각과 이익하고는 거리가 있는 결단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FTA 추진·강정 해군기지 건설·국민연금 개혁은 딛고 선 지지층을 분열시켰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도 저항을 무릅쓰고 노동 개혁·연금 개혁과 부딪혔다. 문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진영의 경계선을 넘는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다. 그에 대한 공로패(功勞牌)가 임기 말 42% 지지도다.

윤석열 정부 출범 20일 후 지방선거가 있다. 첫 내각이 선거 내각이 되는 셈이다. 민주당은 자기들이 사실상 폐기했던 고위공직자 원천 배제 7대 사유를 내걸고 인사청문회를 벼르고 있다. 국민이 이 내로남불 청문회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선거 변수가 될 것이다. 능력만 보고 뽑는다지만 그렇게 고른 사람들을 모아 놓으니 이상한 그림이 돼버리면 그것 역시 문제다. 역대 정부가 균형과 안배를 무시하지 못했던 것이 그들이 무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내각과 청와대 진용 명단을 다시 훑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