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대한민국 조력자와 가족들이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다. 391명이다. 고향을 떠난 이들은 겉으론 환호하지만 두려움이 앞설 것이다. 70여 년 전부터 북한을 탈출한 탈북 난민들도 같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140만명을 넘어선다./뉴시스

법무부 직원의 ‘무릎 의전’ 해프닝이 모든 것을 삼켰지만 아프가니스탄 난민 구출은 의미 있는 성과였다고 생각한다. 자국민과 함께 현지 조력자까지 구출한 나라는 미국, 영국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일본 언론은 이 뉴스를 보도할 때 주어를 ‘구미(歐美) 각국과 한국’이라고 한다. 박범계 법무장관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국제 대열의 한 축이 됐다”고 했다.

한국은 냉전 후 최대 난민 수용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난민은 외국인만 뜻하지 않는다. 해방 후 박해와 전쟁을 피해 한국에 들어온 북한 난민은 14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최대 500만명이란 주장도 있다.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수용하면서 “우리도 난민이었다”고 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엔 역사적 실체가 있다.

북한 난민은 초기 남한에서 냉대와 멸시를 받았다. 여순 사건 때는 경찰과 함께 반란군의 학살 대상이었다. 북한 난민인 나의 아버지는 인천중학 교사를 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앉아서 죽느니 총이라도 쏴보고 죽겠다”며 군에 자원했다. 그 시대 월남민의 처지가 이랬을 것이다. 이런 일을 겪은 후 그들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한국에 정착했다. 난민 1세대에서 국무총리, 2세대에서 대통령이 나왔다. 내가 재직하는 언론사도 난민이 일으켰다. 같은 논설실에도 북한 난민의 자손이 있다. 편집국에는 2차 북한 난민에 해당하는 탈북민이 근무하고 있다. 아무리 동족(同族)이라고 해도 이처럼 단기간에 이주 난민이 정착하는 나라는 드물다. 이리저리 갈려 매일 싸우는 듯하지만 한국인의 본성은 착하고 포용적이다. 다른 민족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한국은 최대 기민(棄民)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기민은 자국민을 버린다는 뜻이다. 전쟁은 많은 억류자를 낳는다. 탈출을 못 해 남은 사람들, 포로로 잡히거나 납치당해 끌려간 사람들이다. 억류자 송환은 나라가 나라이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7년 전쟁 끝에 국가의 체계와 인간의 도의가 완전히 무너진 400년 전 조선조차 납치 억류자 송환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첫 사절이 끌려간 동포를 일본에서 데려오는 쇄환사(刷還使)였다.

'납북인사 송환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한다'는 캠페인을 알리는 1964년 6월 25일 자 조선일보 1면. 휴전 1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한 납북 인사들의 송환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서명운동은 7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전개됐다. 서울에선 종로 네거리, 을지로 입구, 서울시청 앞, 서울역 앞 등 14곳에서 서명운동이 진행됐다. 서명운동 한 달 만에 82만명이 넘었고, 8월 말 101만1980명으로 마감했다. 서명철만 102권에 무게는 303㎏이나 됐다. 조선일보 대표는 그해 12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를 방문해 '납북인사 송환을 위한 100만인 진정서'를 유엔 인권국장에게 전달했다. '납북인사 송환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은 6·25 전쟁과 이산의 비극에 소홀했던 시대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6·25전쟁 때 북한에 끌려간 전시(戰時) 납북자는 8만3000명에 이른다. 억류된 국군 포로도 8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전후에도 3835명이 끌려갔고 516명이 억류됐다. 미국은 억류된 미군을 전원 데려왔다. 한국 정부도 노력했다. 민간에선 납북자 송환 100만 서명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한국 안에서 진상 규명과 기념관 건립 정도가 그나마 이루어졌다. 북한과 소통이 돼야 송환 실마리를 잡는데 소통이 가능한 정권일수록 송환 이슈를 피했다. 북한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외교안보특보가 이끄는 재단이 탈출 국군 포로에게 배상해야 할 한국 내 북한 자산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지켜주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납북자 문제는 망각과 금기의 영역에 갇히는 듯하다.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구출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빛내줬다. 한국과 달리 현지 조력자 구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국 언론은 ‘카불의 치욕’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나라다운가는 고민해야 할 문제다.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 일본인은 17명이다. 그래도 일본은 20년 이상 송환 요구를 밀고 갔다. 정부는 총리 관저 홈페이지에 “납치 문제 해결 없이 국교 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고 명기했다. 2002년 김정일의 사과를 받아냈고 5명을 일본에 데려왔다. 북한이 아무리 “숨졌다”고 해도 나머지 납북자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외국인 구출에는 무능할지 몰라도 이게 나라다운 것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은 일본보다 어려운 입장이다. 북한에 주장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렇다고 침묵이 용인되는 건 아니다. 한국 정부는 정반대 행동까지 했다. 일본인 납치범을 남북 화해 쇼의 대가로 북한에 돌려보내 인민 영웅을 만들었다. 거물 간첩 신광수 송환 문제는 통일 이후 그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김대중 정권 때였다. 이러면서 “납북자를 내놓으라”면 북한이 얼마나 한국을 비웃겠는가.

3년 전 예멘 난민 문제로 반대 시위가 일어났을 때 시위대는 “국민이 먼저다”라고 외쳤다. 나는 단계적 난민 수용에 동의하면서 이 외침엔 더욱 동의한다. 법무부가 “한 축이 됐다”고 자랑한 국제 대열엔 미국·영국·독일·호주 등이 있다. 이 나라들은 국민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서 외국인을 구한다. 한국처럼 적국에 방치한 다수 국민에 대해 침묵하면서 “국가 위상에 맞는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며 자랑하지 않는다. 인도적 행위가 국가의 의무에 앞설 수 없기 때문이다.

전시 납북자와 달리 전후 납북자 516명은 상당수 살아있을 것이다. 박 법무장관은 “대한민국 정부를 도운 친구들을 우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아프가니스탄 친구를 그렇게 아끼면서 왜 우리 국민은 쉽게 포기하는가. 보이고 들리지 않을 뿐 훨씬 가까운 곳에 우리 국민의 고난과 절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