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1: 오리를 잡고 가슴 중앙 껍질을 아래에서 위로 벗기듯 카빙(carving)해 주세요. 스텝2: 오리 어깨 살을 얇게 떠 접시에 담아 주세요. 스텝3: 가슴살은 뼈와 분리하듯 카빙해 한입 크기로 썰어주세요….’
중식 요리사를 위한 교과서가 아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내놓은 ‘북경오리 투고(To Go)’ 세트에 포함된 책자에 담긴 내용이다. 이틀 전 예약하면 잘 구운 북경오리를 소스·오이채·파채·밀전병 등과 함께 보온백에 담아 집으로 보내준다.
북경오리는 전문점에 가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요리다. 집에서 오리 굽기가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지만, 껍질을 썰어내는 ‘카빙(carving)’도 힘들다. 가슴·어깨·다리 등 부위에 따라 껍질만 벗기듯 잘라 바삭하고 고소한 식감을 즐기기도 하고, 살이 살짝 붙게 도려내 촉촉하고 부드러운 육질을 함께 즐기기도 한다. 이처럼 부위별로 두께·크기·깊이를 다르게 카빙하려면 오랜 수련을 거쳐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텔 측은 북경오리 세트를 내놓으면서 카빙하는 방법을 5단계에 거쳐 그림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한 책자를 첨부했다. 그러고도 불안했는지 책자에 QR코드도 넣었다. 휴대전화로 QR코드를 찍으면 호텔 중식 요리사가 카빙법을 시연하는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코로나 이후 ‘가정 간편식’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제 모르는 이가 드물겠지만 ‘밀키트(meal kit)’, ‘HMR(Home Meal Replacement)’이라 부르기도 하는 가정 간편식은 가정에서 간편하게 요리해 먹도록 미리 만들어 파는 음식을 말한다. 포장만 벗겨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부터 기본 밑손질만 된 채로 배달돼 볶거나 찌거나 삶는 등 조리는 소비자가 직접 해야 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밥반찬이나 떡볶이, 순대볶음 등 일상적인 음식을 넘어 북경오리처럼 전문 식당이나 고급 레스토랑에 가야만 먹을 수 있다고 여겨왔던 음식까지 영역이 넓어졌다.
스시(초밥)도 가정 간편식으로 나왔다. 포장을 뜯으면 광어·연어 등 냉동 생선살과 즉석밥, 간장, 고추냉이(와사비)가 담겨 있다. 생선살은 초밥에 딱 맞는 크기와 모양으로 잘려 있다. 즉석밥도 한 공기 분량이 통으로 담겨 있지 않고 개당 15g짜리 작은 타원형 밥 덩이가 줄지어 담겨 있다. 최고급 쌀로 가마솥에 지은 밥은 단촛물로 이미 간이 된 상태. 생선살을 해동해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린 즉석밥 위에 올리기만 하면 초밥이 완성된다. 입맛대로 간장과 고추냉이를 찍어 먹기만 하면 된다.
서울의 또 다른 호텔에서는 ‘캐비아(철갑상어알)’를 가정 간편식으로 내놓았다. 캐비아는 푸아그라(거위간), 트러플(송로버섯)과 함께 서양 3대 진미로 꼽힌다. 훌륭한 식사 경험은 음식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한 단어로 압축해서 말하자면 ‘분위기’가 중요하다. 분위기는 식당 인테리어, 서비스, 배경음악, 음식이 담겨 나오는 접시, 포크·나이프와 같은 식기 등으로 구성된다.
분위기의 중요성을 잘 아는 호텔에서는 원하는 손님에게 ‘플레이팅 가이드(plating guide)’, 즉 음식을 접시에 담는 노하우를 함께 보내준다. 음식을 여러 가지 주문하면 메뉴 카드에 인쇄해 보내준다. 호텔 내 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먹을 때의 기분을 느껴보라는 배려다. 추가 금액을 지불하면 식탁 분위기를 더욱 높여줄 꽃 장식도 주문 가능하다.
북경오리와 스시, 캐비아를 시험 삼아 집으로 주문했다. 북경오리는 책자에 나온 대로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섭씨 160도에서 12분 데운 뒤 카빙했다. 생선살을 해동해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린 초밥에 올려 스시를 완성했다. 일회용 포장에 담겨 배달된 캐비아는 플레이팅 가이드대로 접시에 담으니 꽤 그럴싸했다.
예상보다 만들기도 어렵잖고 맛도 썩 훌륭했다. 하지만 삐뚤빼뚤 잘린 북경오리를 소스, 파·오이채와 함께 밀전병에 싸 먹으면서 전문 요리사가 절묘하게 카빙한 북경오리가 그리웠다. 오랜 경험으로 눈으로 보지 않고 밥통에 손만 집어넣고도 15g씩 초밥을 잡는 요리사가 눈앞에서 쥐어 주는 스시가 먹고 싶어졌다. 비릿한 듯 고소한 캐비아를 식탁에 홀로 앉아 맛보기보단 여럿이 떠들썩하게 먹던 때가 그리워졌다. 그런 시절은 언제 다시 돌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