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세계를 세 계급으로 나눴다. 최상위 계급은 백신을 여유 있게 확보해 집단면역의 길로 나가고 있다. 다음은 백신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동맹과 우방의 도움으로 희망이 비치기 시작한 나라들이다. 최하위 국가들은 백신 제조 회사 앞에 목을 빼고 기다린다. 한국은 세계 최빈국(最貧國)들과 이 마지막 줄에 서 있다.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지도부의 판단력 문제다. ‘강대국이 국제 공조를 외면하고 국경 봉쇄·백신 수출 통제·사재기 등으로 각자도생(各自圖生)만 꾀하고 있다’고 미국을 향해 핏대를 세워봐야 나라 꼴만 처량해진다. 이 판에 중국 치켜올리기를 끼워 넣은 것은 더 악수(惡手)다.

국가 지도자가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의 우선순위를 뒤집으면 나라의 기본 틀이 흔들린다. 삼권분립을 훼손하고 국회를 다수당 독재의 입법 기계로 타락시키고 선거의 감시자인 중앙선관위를 불공정한 심판으로 만들어버렸다. ‘하고 싶은 것’ 앞에선 자제력(自制力)을 상실하는 정권이다. 검찰·공수처·국가수사본부는 권력의 사병(私兵)이 되고 ‘하나회 출신’이 장악한 법원은 정권의 방탄(防彈)조끼가 돼 버렸다. 비정상화된 국가 기간 조직을 정상화하려면 훗날 비정상적 조치가 불가피해진다. ‘비정상의 악순환’이다.

국가 지도자의 핵심 요건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하는 선견력(先見力)을 꼽는다. 그러나 그건 1920년대 독일의 정치 혼란과 경제 파탄의 소용돌이를 보고 히틀러의 등장을 예측했던 처칠처럼 출중(出衆)한 리더에게나 바랄 수 있는 자질이다. 보통 지도자는 지나간 과거와 눈앞의 현재만 정확히 읽어도 합격이다. 그러려면 더 중요한 일을 위해서 덜 중요한 일을 뒤로 돌리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얻어 쓴 빚과 오늘 잔칫상을 받으려고 끌어다 쓴 빚의 결과가 같을 순 없다. 코로나가 녹을 무렵엔 빚을 얻어 미래를 대비했던 경제와 빚으로 잔치를 벌였던 경제가 확연히 갈릴 것이다.

국가 지도자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해선 안 될 것’을 가려야 나라 진로가 안전해진다. 현실을 현실대로 인식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국제 관계에서 현실주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능숙하게 운용함으로써 국가 목표를 달성하는 지혜다. 그런 뜻에서 현실주의 외교의 반대말은 이상주의 외교가 아니라 자신이 갖지 못한 카드를 꿈꾸다가 나라를 그르치는 ‘몽상(夢想) 외교’ ‘집착(執着) 외교’다. 바이든 대통령에게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계승하라고 주문(注文)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오른쪽)이 4월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웨이펑 허 중국 국방장관과 만나고 있다/연합뉴스

상대의 가면(假面)에 홀리면 나라가 위험해진다. 김일성은 공식적 또는 비밀리에 40여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그 가운데 두 번의 방문이 특별했다. 한 번은 6·25 남침을 코앞에 둔 1950년 5월 방문이다. 남침을 협의했다. 사이공 함락 후 1975년 4월 방문도 수상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毛澤東)·저우언라이(周恩來)·덩샤오핑(鄧小平)과 차례로 만나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면 “잃어버릴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는 것은 통일”이라며 사실상 무력 통일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6·25로 동포 수백만 명을 살상(殺傷)하고도 김일성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이 미·중 관계 개선에 골몰했던 때라 대답을 받아내지 못했다. 손자는 얼마나 다르겠는가.

국제 관계에선 평판(評判)이 때론 국가의 실제 모습 이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세계의 화약고(火藥庫) 가운데 하나가 남중국해(South China Sea) 섬 영유권과 항해 자유 보장 문제다. 중국과 미국을 비롯한 아세안 6국이 부딪치고 있다. 베트남은 지도에 남중국해가 아니라 자기 나라 기준으로 동해(East Sea)로 표기(表記)한다. 베트남은 아세안 국가 중 유일하게 중국의 윽박지르기 영토 주장을 또박또박 거르지 않고 논리적으로 반박해왔다. 중국이 거대(巨大) 군함을 출동시키면 베트남은 작은 군함으로라도 맞섰다.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중국을 거명(擧名·naming) 하거나 공개적 망신(shaming)은 주진 않는다는 스스로 정한 선(線)을 지켰다. 이런 베트남을 중국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한 국가가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리한 요구에 맞서기를 두려워하면 그게 굴레가 돼 종당엔 발가벗김을 당하고 만다. 유화주의(宥和主義) 외교의 말로(末路)다. 베트남은 지혜와 담력으로 중국을 상대했고 한국은 그 반대로 북한과 중국을 대해왔다. 국제사회에서 어느 쪽 평판이 높겠는가. 대답은 들어보나 마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