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인생을 길게 산다는 것은 상실의 과정이기도 하다. 인생 후반은 별의별 이별을 하고, 공유 기억도 줄어든다. 결국 얼마나 오래 기억력을 유지하며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그래야 치매도 늦게 오고, 일상도 다채롭다. 어떻게 하면 나이 들어도 기억력을 괜찮게 할 수 있을까. ‘경험력’으로 기억력을 높일 수는 없을까. 지금까지 이뤄진 기억 연구를 보면, 그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다.

먼저 하버드대 의대 신경과 연구팀이 제시한 퀴즈를 보자. 다음 이야기 읽고 답을 골라보시라. 이해를 돕기 위해 설정을 한국식으로 바꿨다. “당신은 현재 65세다. 추석을 맞아 인근 도시에 사는 누나를 만나러 자동차 운전 길에 올랐다. 누나가 추석날 저녁상을 차리고 나를 초대한 건 5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날은 삼촌이 우리와 함께한 마지막 추석이었다. 삼촌의 새 간병인이 삼촌을 누나 집으로 모시고 왔었다. 그리고 석 달 후 삼촌은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누나의 딸 조카가 임신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날이기도 했다.”

예순다섯 당신이 5년 전 누나 집 방문을 떠올리면서 다음 중 무엇을 기억하고 있고, 잊어버렸는가가 문제다. ①자동차 파킹(parking) 브레이크 푸는 법 ②삼촌 이름 ③삼촌 간병인 이름 ④조카 임신에 대한 가족들 반응 ⑤누나 집으로 가는 길 ⑥송편을 가져가겠다고 자동차에 넣었던 일. 이 중 ③번과 ⑥번은 기억이 안 나도 된다. 나머지는 잊지 않고 있어야 한다.

이유를 살펴보자. 자동차 브레이크 푸는 법은 ‘절차 기억’이다. 이건 나이 먹어도 아주 오래간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핸들 조종하는 법을 한 번 익혔으면 오랜 기간 자전거를 안 탔어도 다시 탈 수 있는 것과 같다. 신발 끈을 묶는 것처럼 습관 기억이다. 친숙한 삼촌 이름을 벌써 잊었으면, 기억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거로 봐야 한다.

③번 삼촌 간병인 이름은 기억 못 해도 된다. 수년 전 한 번 본 사람의 이름은 쉽게 잊어버린다. 단기 기억에 저장됐다가 자주 쓰지 않아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조카 임신 성공 뉴스 같은 정다운 얘기는 정서 기억이다. 나이 들어도 기쁨과 슬픔의 정서 기억은 오래간다. 그때가 연상되면 당시 감정도 떠오르는 식이다.

누나 집 가는 길은 방문 횟수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자주 찾았는데, 어느 날 길을 잃었다면, 기억력 장애 징조로 볼 수 있다. ⑥번 송편을 가져갔던 기억은 추석에 했던 흔한 일이기에 생각이 안 날 수 있다. 여행 짐을 싸면서 여러 것을 챙겼던 기억과 같다. 일상은 기억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다들 나이 들면서 누군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내 기억에 문제가 생겼나?” 하며, 내심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대개 정서 감정과 결합되지 않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 이름이니,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 나이가 쉰을 넘으면 기억한 것을 다시 떠올리는 속도가 점차 느려진다. 기억으로 입력을 못 시키는 건 아니다. “나, 혹시 치매 아냐?”라고 말하는 이도 많은데, 그런 말 할 정도면 아직 치매는 아니다. 치매가 생기면 이런 인식조차 없어진다.

나이 들어도 기억력을 좋게 유지하는 방법은 뭘까. 운동, 새로운 학습, 충분한 수면, 술·담배 자제 등은 기본이다. 거기에 정서와 습관 기억을 이용하면 좋다. 열쇠나 지갑, 돋보기, 휴대전화를 항상 그 자리에 두라. 주차 장소처럼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사진 찍듯 눈으로 보고, 말로 되뇌고, 손으로 써보거나 만져보라. 정보가 다양해서 기억이 잘된다. 간직해야 할 말씀이라면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들으면 된다. 새로운 공간이나 조용한 카페에서 대화하면 장소와 환경 자극이 더해져 기억이 길게 간다. 자식들과 집에서만 얘기하니, 일상이 되어 기억이 지나간다. 이메일이 꽉 차면 비워야 새것이 들어오듯, 기억도 채울 곳이 있어야 한다. 기록을 많이 해놓으면 기억에서 자유로워 저장 빈자리가 생긴다.

느낌이 더해질수록 오래가는 기억으로 남는다. 이는 경험 많은 자가 더 잘할 수 있다. 누군가를 오래 기억하고 싶거나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면, 조금 더 힘써서 감성 묻은 추억으로 만드시라. 누군가와의 3만원 식사는 기억이고, 30만원 식사는 추억이 되듯 말이다. 지나온 삶의 행로와 기억이 추억으로 남는다면, 노년 삶이 행복하지 않을까. 모든 건 사라지고 남은 건 추억뿐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