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연구소는 2025년 9월 서울에서 ‘한반도 에너지 지정학’을 주제로 정책 게임(Policy Game)을 개최했다. 산업계 리더와 안보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2028년 9월 대만해협과 남중국해가 봉쇄되는 가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국이 맞닥뜨릴 에너지 위기와 공급망 교란의 정치·경제·안보적 파급 효과를 단계별로 시뮬레이션한 것이다.
정책 게임은 다소 낯선 개념일 수 있으나, 이는 랜드연구소가 지난 60여 년간 미국 정부와 군을 위해 개발된 군사적 위기 대응 시나리오 ‘Table Top Exercise(TTX)’를 발전시킨 형태다. 군사 중심의 ‘워게임(war game)’에서 출발했지만, 안보의 개념이 경제·기술 분야로 확장되면서 정책 게임이라는 형식으로 진화했다. 예컨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교란이나, 인공지능(AI) 기반 사이버 공격 등 복합 위기 상황을 가정하고, 10명부터 많게는 30~40명이 넘는 그룹이 한자리에 모여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참가자들은 이 과정에서 각기 다른 기관의 역할을 맡아 복합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을 모색하며,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정책 대응 역량을 키워 나간다.
랜드연구소가 에너지 안보 정책 게임의 첫 대상국으로 한국을 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지정학적 요충지이면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95%에 달하는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중공업·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은 안정적 에너지 공급 없이는 작동하기 어렵다. 이 시나리오의 시점을 2028년 9월로 설정한 것은 그해 5월 대만 대선 이후 고조될 수 있는 대만해협 긴장을 염두에 둔 전략적 판단 때문이다.
참가자들은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봉쇄가 현실화하면, LNG 터미널·정유 시스템·통신망에 대한 AI 기반 사이버 공격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디지털 인프라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은 복합적 위협에 노출돼 있으며, 위기 시 에너지 배급, 동맹국 및 주변국과의 조율, 통신망 관리 등 핵심 사안에 대한 신속한 결단이 국가 안정성을 좌우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정책 게임을 통해 에너지 공급망과 해상 경로, 데이터 시스템의 다변화가 전략적 필수 과제임을 확인했고, 공공·민간의 긴밀한 협력과 동맹국과의 조율이 위기 대응력과 회복력을 높여준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대만해협 변수는 한국의 에너지 안보가 지정학적 안정성과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줬다. 한국은 에너지 안보를 물류 문제가 아닌 국가 및 지역 전략의 핵심 축으로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최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는 이러한 취약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봉쇄는 수입 원유의 약 95%를 해당 항로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중동발 에너지 흐름의 차질은 생산비와 물류비 상승을 불러왔고,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키며, 방산 제조 준비 태세까지 흔들고 있다. 중동 의존의 전략적·경제적 위험 비용이 얼마나 큰지 생생히 체험한 것이다.
미국 싱크탱크들의 강점은 미래 위기를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고 그에 맞는 다각적 해결책을 사전에 설계한다는 데 있다. 한국도 이번 호르무즈 사태를 교훈 삼아 몇 년 후 대만해협에서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에너지 안보 다변화를 위한 장기 로드맵을 지금부터 그려야 한다. 한국 정유 인프라의 약 70~80%는 중동산 중질 원유 처리에 최적화돼 있지만 구조적 전환이 불가피하다. 미국을 비롯해 호주·서아프리카 등 안정적 공급원을 중심으로 경질 원유의 비중을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한국의 방위산업과 첨단 제조업의 일부를 경질 원유 공급망과 연계해야 한다. 헬륨과 나프타 같은 핵심 소재의 대체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신흥 에너지 생산국과의 기술 이전 및 투자 협력도 강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비(非)화석 에너지 다변화가 시급하다. 2024년 2월 체결된 한·미·일 소형모듈원자로(SMR) 및 첨단 원자력 기술 협력 협정을 적극 활용해 걸프 지역 의존도를 줄이고 인도·태평양 지역의 에너지 회복력을 키워야 한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는 더이상 경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고조되는 시대, 에너지 전략은 국가의 지속 가능성과 동맹의 신뢰를 가늠하는 척도다. 그 전략적 전환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