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달 창당 80주년 기념행사 과정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차별적으로 예우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평양에 도착한 중국 국무총리를 박태성 북한 내각 총리가 영접했다. 반면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맞이했다./ 노동신문 뉴스1

경주 APEC을 계기로 미북 정상회담 가능성이 거론됐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미북 정상이 다시 마주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현실적 제약이 많았다. 싱가포르·하노이·판문점에서 웃으며 손을 맞잡던 시절과는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2019년까지만 해도 북한은 비핵화를 수용할 태세를 보이며, 북미 관계 개선으로 제재 해제 등 현실적 목표를 노렸다. 그러나 2022년 9월 핵무력정책법을 채택한 뒤 비핵화를 거부하면서 ‘핵보유국’ 인정을 주장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만남은 상징성 이상의 실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핵 보유 세력(nuclear power)’이라 부르며 방한 기간 연장 가능성도 언급했지만 ‘깜짝 회동’이 성사되진 않았다. 북한은 미국에 대한 비난과 미사일 발사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언젠가 대화가 재개된다면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과 미국, 북한 모두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의 조건과 절차를 정비할 시간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역할이 배제된 미북 대화는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다.

러시아와 중국, 북한은 사실상 전략적 공조체를 형성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군사적 지원이 절실하고, 북한은 이 틈을 타 러시아에 군수 물자와 인력을 제공하며 에너지·식량·기술을 확보한다. 중국은 ‘중립’을 표방하지만 러시아산 원유 수입, 군수품 수출 등 간접적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 질서가 다극화하는 가운데, 북중러는 새로운 협력 구도를 모색 중이다. 단단한 동맹이라기보다 각자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느슨한 공조’에 가깝다. 러시아는 전쟁 수행을 위해, 북한은 정권 생존 보호막으로, 중국은 미국 견제용으로 이 관계를 활용한다. 우리는 이 변화 속에서 위협뿐 아니라 기회를 인식해야 한다.

지난해까지 냉랭하던 북중 관계는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대북 수출은 9월 기준 전년보다 30% 이상 증가했고, 김정은의 방중에 이어 북한 노동당 80주년 행사에 중국 총리가 참가하고 북중 정상이 ‘전통적 우의와 혈맹 관계’를 강조하는 장문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점은 정치적 신뢰가 복원된다는 방증이다.

북한에 중국은 ‘최후의 안전 보루’이며, 중국과 하는 무역은 생존선에 가깝다. 러시아와 밀착해 ‘보완적 파트너’를 확보했지만, 전략적 심장은 여전히 베이징에 묶여 있다. 중국 또한 북한을 완충지대 겸 협상 카드로 유지한다. 대미 관계가 불안정할수록 북중 관계를 강화해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다. 북중 관계 회복은 남북 관계에 도전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 주도로 한반도 평화 구조를 만들어 갈 틈새를 열 수도 있다. 모든 관계의 변화는 조용히 시작된다. 미세한 흐름 속에서 외교 공간이 생겨난다. 북한이 창당 80주년 기념행사 과정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차별적으로 예우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평양에 도착한 중국 국무총리를 박태성 북한 내각 총리가 영접했다. 박태성은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내각 총리로 권력 서열 2위이다. 반면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현 집권 여당 당수)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맞이했다.

외교관으로 수십 년 근무한 필자는 북한이 의전을 메시지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알고 있다. 메드베데프의 전직과 북러 특수 관계를 고려하면 외무상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김성남 국제부장 정도가 영접하는 것이 상식이다. 2019년 2월 하노이 방문 후 귀국한 김정은은 북한 주재 베트남 대사관 성원들을 위한 만찬을 외무성에 지시했다. 베트남 정부가 자신의 방문에 호혜를 베풀어준 데 대한 감사 표시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다른 계산이 있었다. 북미 관계 개선을 제약하는 중국을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이처럼 의전상 급수 차이는 곧 메시지다. 메드베데프에 대한 영접 급수 설정에도 미묘한 신호가 숨어 있다. 변화는 늘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시작된다.

한미일 공조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북중러 연대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축에 대한 정교한 외교적 관리가 필요하다. 미국이 관세와 투자로 우리를 압박하고, 동시에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조건 없는 대화를 준비하고, 북한 외무상이 러시아와 벨라루스를 순방하며 전략적 유대를 다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느 한쪽에만 기댈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북중러 결속을 예의 주시하며 한반도 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모두와 대화의 문을 열어두고, 원칙과 유연성을 병행하는 다층적 균형 외교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