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형 서점 한쪽에서 ‘사십구년유월, 어느 날의 일’이라는 투박하고 굵은 서체로 제목이 쓰여 있는 두꺼운 소설을 발견했다. 남자 4명, 여자 1명 모두 5명의 젊은이가 어떤 곳을 바라보는 80년대 운동권 판화 스타일의 표지였다. ‘김석’이라는 낯선 이름의 작가가 쓴 책. 책은 “대구에서 제주 4·3까지 남조선 혁명 투쟁이 어떻게 이식되고 확장됐는지, 다섯 인물의 투쟁과 죽음을 통해 그린 소설”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책 소개만 보면 이 책은 누구 편인지 쉽게 판별하기 어려웠다. 책을 소개한 신문 기사도 없었다. 5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소설로서의 재미와 함께 여러 가지 사유할 소재를 던져주는 새로운 시각의 소설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누군가에게는 가슴이 뜨거워질 수도 있는 논쟁적 내용들이었다.
제주 4·3은 78년 전 일이지만 해가 갈수록 우리 사회에 새로운 숙제와 과제를 남기고 있다. 통합이 아닌 분열로, 정리가 아닌 또 다른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이 갈등이 해결되지도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제주 4·3을 다룬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내 이름은’을 관람한다고 국민 통합이 이뤄질 리 없다.
최근 박진경 대령의 서훈 취소부터 박 대령을 암살했던 군인들에 대한 일각의 추모 분위기까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지만 다른 한쪽에선 ‘역사 왜곡’이라는 주장이 충돌하고 있다. 토론회 한 번으로, 무슨 책 한 권으로 정리될 문제가 아니다. 사실과 편견, 허구와 주장이 마구 뒤섞이고 정치 권력이 여기에 편승하고 있다. 소설 ‘사십구년유월, 어느 날의 일’ 역시 또 다른 논란을 제기할 만한 책이다. 그러나 제주 4·3을 ‘민간인 학살’이냐 ‘남로당의 폭동’이냐 같은 ‘결과’가 아니라 왜 한반도의 청년들은 해방과 6·25 전쟁의 사이에서, 경성과 대구, 제주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폭탄을 던지고 죽창을 가슴에 꽂으면서 싸우고 충돌했는지 그 과정을 보여 준다.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처절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민중들은 굴하지 않고 역사의 파도를 헤쳐나왔다는 점을 소설적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보통 신간이 나오면 출판사에서 언론사에 보도 자료를 보내는 방식으로 홍보를 하는데 이 책은 그런 게 전혀 없다. 서평이나 신문 기사도 한 줄 없다. 개인 돈 1500만원을 들인 자비 출판이었다고 한다. 출판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작가 김석(필명)과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고, 13일 그에게서 답 전화가 왔다.
-소설가 김석.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전에도 책을 쓴 적이 있나.
“처음이다. 다른 책도 쓴 적이 없다. 이 책이 첫 작품이다.”
-자신을 직접 소개해달라.
“1970년생이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을 다니다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전업 작가도 아닌데 어떻게 소설을 쓸 생각을 했나.
“방송에서 스타 역사 강사라는 분이 제주 4·3을 설명하면서 영구 분단을 획책하려는 남한의 단독선거에 저항했던 제주도민들을 군인과 경찰이 학살했다고 설명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제는 이런 식의 설명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해 제주 4.3하면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총을 든 군인과 경찰이 평화롭게 감자를 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무명옷을 입은 소녀를 잔인하게 학살하는 이미지 말이다. 어느 한쪽 사람들이 만든 이런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평범한 생활인이 소설까지 쓸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요즘 학생들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면 4·3 관련 추모 시설도 방문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인이 거기서 나오는 학생들이 “이승만 개새끼”라고 욕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줬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고 싶었다. 소설 같은 것 쓰지 않고 지금 이대로 살아도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오히려 소설을 쓰면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고 피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욕을 좀 먹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소설을 어떻게 준비했나.
“작년 여름부터 집필을 시작해 올 초에 완성했다. 그리고 올해 4월 3일에 맞춰 출간했다.”
-자비로 출판했다는데.
“소설가도 아니고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 개인 돈 1500만원을 들여 직접 책을 낸 것이다. 일종의 사명감이라고 해야 할까.”
-보도자료도 신문사의 서평도 없다. 그냥 교보문고 매대에만 전시됐던데.
“사실 그것도 광화문점 285만원, 강남점 230만원을 내가 직접 주고 한 것이다. 출판사가 한 게 아니다(웃음).”
-소설이 꽤 흥미진진하다. 자료 조사는 어떻게 했나.
“기본적인 서적들은 대부분 절판이 됐지만, 국립도서관에 가면 절판된 책을 찾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신문 기사들이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그런 사료들에 기초하고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했다.”
소설에는 다섯 명의 청춘이 등장한다. 소설이지만 이 책은 현대사의 중심을 관통했던 인물들이 일부 실명으로 등장한다. 남로당 진영의 김달삼과 이덕구, 이북 출신의 우익 청년 임일과 선우정, 그리고 비극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대한민국 민중 고효순이다. 이 중 선우정과 고효순은 100% 가상의 인물이며 이덕구와 임일은 사실에 기반해 소설적 허구를 일부 덧붙였다고 한다. 김달삼(이승진)은 실존 인물이다.
-4.3을 사실대로 묘사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제주 민중의 봉기,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대세적 관점에서 벗어나면 정치적으로 시달림을 받을 수도 있다.
“사실 지금의 편향된 역사관의 시작은 1970년대 백낙청씨의 ‘창작과 비평’, 리영희씨의 ‘전환시대의 논리’, 그리고 해방 전후사의 인식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하나의 관점으로 역사를 다시 쓰려 한 것이고, 결국 이들의 인식이 지금의 주류적 역사관이 됐다. 이들에 대한 가치 평가를 떠나 그들은 당시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용기를 내 그런 일을 한 것이다. 반대로 지금 그런 역사 왜곡을 바로잡으려 한다면 그들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나부터 용기를 내본 것이다.”
-소설에는 우익에 의한 백색 테러와 좌익에 의한 군경 및 민간인 살해가 함께 묘사돼 있다.
“사실에 근접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여자 주인공 고효순은 우익에 의한 백색 테러로 실명했다. 군경이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나온 것도 사실이고 좌익 유격대의 민간인 학살도 사실이다. 2003년 발간된 정부의 4.3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군경에 의한 희생자와 별개로 남로당 유격대에 의한 희생자가 2000여 명에 달한다. 왜 이런 희생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
-왜 연구서가 아니고 소설인가.
“제주 4.3을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해방과 대구, 그리고 제주 4.3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봐야 전체가 보인다. 이걸 보여주려면 소설이나 영화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영화를 만들 재주나 돈이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소설을 써본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홍보할 방법을 몰랐다. 일부 기자와 유튜버에게 이메일을 보낸 것 같은데 아무런 답이 없다고 한다. 기자는 서점 매대를 지나치다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마케팅이나 홍보가 없었지만, 서점 사이트에 리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1946년 경성에서 대구, 제주로 이어지는 남로당과 이를 추종하는 이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현대사 공부를 다시 하게 만드는 텍스트”
“해방 공간의 혼란이 어떻게 비극으로 수렴되는지, 그 인과관계를 이토록 명확히 짚어준 소설이 있었나 싶다. 특정 진영의 논리가 아니라, 당시의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는지 분석하는 태도가 매우 지적이다”.
작가는 “계약 때문에 대형 서점 매대 전시도 이번 달이면 끝난다. 초판 2000부를 찍었는데 다 팔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소설은 악인도 영웅도 없다. 다만 같은 시대를 통과하며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다섯 명이 있을 뿐이다. 이들의 선택은 결국, 당신의 질문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