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의 경기도 이천 본사에 있는 M16 모습. /하이닉스 제공

2000년대 초 현대그룹에서 분리돼 홀로서기를 하던 하이닉스에선 운영 자금마저 말라 사무실마다 형광등 하나 빼기와 구내식당의 반찬 수 줄이기까지 했다. ‘100만 닉스(주가 100만원 SK하이닉스)’를 눈앞에 둔 지금은 거짓말처럼 들리는 전설이다. 한 달에 30여 명씩 연구 인력이 떠나고 나면 직원들끼리 소주잔을 부딪치며 외치는 건배사가 있었다. “Go Man Go, Is Man Is”.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자’는 이 엉터리 영어엔 하이닉스 신화의 또 다른 비결, 벼랑 끝 투지가 숨어 있다.

우리는 기술 패권이란 게 탄탄한 자본과 정교한 시스템 위에 있다고 믿는다. 역사는 다른 증거를 내놓고 있다. 인텔이 CPU(중앙처리장치) 왕국을 건설한 것은 벼랑 끝 쇄신의 결과였다. 1980년대 일본의 공세로 주력인 메모리 사업은 망하기 직전이었다. 사장 앤디 그로브가 “새 경영진이 오면 가장 먼저 뭘 할까” 묻자, 회장 고든 무어는 “메모리 사업부터 치우겠지”라고 답했다. 그로브는 말했다. “우리가 직접 하자.” 인텔은 직원 3분의 1을 해고하고 7개 공장의 문을 닫으며 CPU에 올인했다.

초일류 기업들의 성공기엔 이런 전설이 수두룩하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30여 년째 “파산까지 30일 남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1995년 첫 제품인 ‘NV1’이 실패하면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마지막 희망이던 ‘RIVA 128’에 모든 걸 걸던 때 수십억 원짜리 검사 장비 살 돈이 없어 수동 검증 작업이란 원시적 방식까지 동원했다. 여기서 성공 못했다면 AI 생태계도 한참 뒤에 왔을 것이다.

대만 TSMC엔 ‘나이트 호크’라는 R&D(연구개발) 시스템이 있다. ‘삼성 타도’를 외치며 2014년 10나노 공정 개발 때 도입됐다. 예샤오(올빼미) 부대로 불린 400여 명의 정예 엔지니어들을 24시간 3교대로 투입, 연구소를 1초도 쉬지 않게 했다. “1년 치 업무를 4개월 만에 끝낸다.” 목표를 달성했고 2년 뒤 애플의 A10 칩 물량을 독점 수주했다.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는 또 어떤가. 2006년부터 팰컨 1 로켓이 연이어 3차례 실패했을 때 엔지니어들은 태평양의 외딴섬 오멜렉에서 극한의 환경과 싸웠다. 바닷바람에 의한 부품 부식과 물류 고립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실패 원인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빠르게 실패하고 빠르게 배운다(Fail fast, learn faster). 포기란 없다.” 머스크가 말로 쓴 혈서였다.

냉정하게 보자. 지금 한국에 반도체 빼고 세상에 내놓을 AI 경쟁력이 있는가. 소프트웨어는 미국에 밀리고, 하드웨어는 중국에 추월당했고, 자본력은 빅테크의 발치에도 못 미친다. AI 기술은 6개월 아니 3개월 만에 세대가 바뀐다. 이 속도전에 살아남으려면 시스템 위에 투지가 결합돼야 한다. 우리는 투지를 북돋워도 모자랄 판에 꺾고 있는 건 아닌가. 오후 6시 연구소 불을 끄지 않으면 형사처벌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나. 1년 넘게 걸리는 ‘오디션’ 방식 국가대표 AI 선발전은 한가롭기 짝이 없다.

물론 성공을 ‘정신력’ ‘투지’로만 이룰 순 없다. 산업 사이클, 개인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조류와 구조적 기회 등 운도 엄청 중요하다. 그렇다고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자”는 구호가 박물관으로 갈 유물은 아니다. 승부처는 늘 자본과 기술 그 너머에 있었다. 원조 못 받으면 굶어야 했던 우리가 글로벌 경제의 핵심 엔진이 된 비결도 마찬가지 아닌가.

“한국은 희망적이다. 소득 2만달러 넘는 나라 중 온 국민이 ‘아직 배고프다’는 나라는 거의 없다.” 15년 전 만난 글로벌 신용평가사 관계자의 얘기였다. 지금 우리를 보면 그가 무슨 말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