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울시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CIA 국장 재직(1993~1995년) 때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선제 타격을 검토하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2015년이었다. 그는 기자에게 “미국이 그때 영변을 때렸다면 북한의 핵 능력이 지금처럼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당시의 결정이 지금 북핵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10여 년이 지나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훨씬 더 고도화됐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핵보유국 지위는 절대불퇴” 발언을 북한 매체가 전했을 때 울분을 삭이지 못하던 울시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베네수엘라와 이란 사례는 그것과 대비된다. 강대국이 마음만 먹으면 독재 국가의 최고 지도부를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비정상적인 체제를 정상적 방법으로 끝장내기는 어렵다. 37년간 이란을 철권 통치한 최고 지도자와 군 수뇌부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하루아침에 폭사했다.
김정은에게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는 최근 5000t급 신형 구축함의 전략순항미사일 시험 발사와 추진력을 높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용 고체연료 엔진 시험을 참관했다. 핵으로 때리면 핵으로 보복할 수 있다는 의지와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북한은 이미 2022년 9월 채택한 ‘핵무력 정책법’ 3조 3항에서 지도부가 공격당할 경우 적대 세력에 대한 자동적인 2차 핵 보복 공격을 명시했고, 김정은은 최근 최고인민회의에서 남한을 ‘가장 적대적 국가’로 공인했다. 큰 개는 짖지 않고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과도한 자신감은 극심한 불안감의 이면일 수 있다.
북한 지도부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미국의 핵 공격도, 한류(韓流)도 아니고 주민들의 민심이다. 핵탄두 100개, 1000개 따위로는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없다.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 통제를 강화하고 사상 교육을 더 몰아붙이는 방식을 택했지만 그럴수록 밑바닥 깊은 곳에 불만이 더 농축될 수밖에 없다. 그들도 욕망이 있고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류는 평생 세뇌당한 북한 인민에게는 ‘해독제’나 다름없다. 남한이 없었다면 북한 지도부는 벌써 이란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평양을 때리면 북한은 그 분풀이를 미국의 군사 동맹인 남한에 할 게 뻔하다. 남한 덕분에 미국의 대북 군사 작전이 검토 단계에 머무르고 마는 측면을 김정은 체제는 모른 척하고 있다. 미국이 군사 공격을 실행하더라도 동맹과 미리 상의할 것 같진 않지만, 사전 통보나 논의를 거친다면 진보·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확전으로 번질 수 있는 군사적 접근은 일단 만류할 가능성이 크다. 한류의 영향을 의식한 북한이 남한과 절연하고 나선 건 스스로 ‘비상구’를 폐쇄한 어리석은 결정이다.
미국은 이란과 쿠바 상황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북한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다. 북한에 살 때 차라리 전쟁 나서 통일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탈북민을 적잖이 봤다. 김정은과 기념 촬영을 하면서 노래방 개업 풍선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충성심을 연출한 북한 외교관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까. ‘사회주의 지상낙원’에 산다는 북한 주민들은 지도자의 일장 연설이 끝날 때마다 학습회·강연회·궐기대회 등 줄줄이 열리는 행사에 동원된다. 청년·학생·여성 가릴 것 없이 각 지방의 건설 현장과 탄광을 비롯한 ‘험지’에 탄원(자원)했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고 노동신문에 실린다. 미국이 평양을 공격하면 이들은 지도부 결사 옹위에 나설까, 아니면 하루라도 인간답게 사는 길을 택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