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1986년 12월 미국 코네티컷주 사우스버리에서 항공사 승무원 헬레 크래프츠가 실종됐다. “헬레의 남편 리처드가 새벽 강가에서 나무 파쇄기를 돌리는 것을 목격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한 경찰은 뉴헤이븐대 법의학자 헨리 리(李昌鈺)에게 도움을 청했다. 리는 강변을 수색한 끝에 뼈조각 56개, 치아 하나, 손톱 하나, 머리카락 2660가닥을 찾아냈다. 모두 합쳐 85g에 불과한 증거였다.

리는 돼지 사체를 나무 파쇄기에 간 뒤 나온 뼈조각의 모양으로 범행 도구를 특정했고, 헬레의 치과 기록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침실에서 희미한 혈흔도 찾아냈다. 1989년 리처드는 살인죄로 50년 형을 선고받았다. 코네티컷 역사상 시체 없는 첫 살인 유죄 판결이었다. 사람을 나무 파쇄기에 넣는 엽기적인 행각은 훗날 영화 ‘파고’의 모티브가 됐다.

1994년 발생한 OJ 심슨 사건은 리를 세계적 과학자로 만들었다. 변호인단에 합류한 리는 경찰이 제시한 혈액 증거에서 나와서는 안 될 보관용 방부제가 발견됐다는 점을 지적하며 배심원들을 향해 “뭔가 잘못됐다(something wrong)”는 말을 던진다. 이 말은 당시 인종차별 논란이 거세던 미국에서 “경찰이 흑인 스타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의혹이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뉴욕타임스는 2000년 ‘모든 단서를 가진 남자’라는 기사에서 리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법의학자”라고 썼다. 리는 600개 법 집행 기관의 자문을 맡았고, 법정에서 1000번 이상 증언했다. 검사와 변호사는 리를 영입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리는 법정에서 과학을 무기로 화려한 공연을 펼쳤다. 리가 등장하면 ‘법정 연극(코트룸 시어터)’을 보기 위해 취재진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리는 만년필로 붉은 잉크를 종이 위에 떨어뜨리며 혈흔의 패턴을 설명하는가 하면, 케첩과 머스터드를 뿌리며 칼에 찔린 상처의 방향과 순서를 재현했다. 자외선 조명과 레이저빔을 법정에 처음 들고 나온 사람도 리였다. CSI를 비롯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한 법의학 기법의 원조인 셈이다.

지난 27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난 리의 부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의 업적 뒤에 숨겨졌던 이면이다. 법의학계의 스타가 된 리는 법정에서의 승리를 위해 증거 조작과 거짓 증언을 서슴지 않았다. 2007년 배우 라나 클락슨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유명 음악 프로듀서 필 스펙터 사건에서 판사는 리가 범죄 현장에서 핵심 증거를 훔쳐 숨겼다고 판단했다. 2023년에는 1985년 코네티컷 뉴밀포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 리가 범인으로 지목했던 10대 노숙자 두 명이 무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리는 혈흔이 나왔다며 수건을 제출했는데, 실제로는 검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누명을 쓴 사람들은 무려 30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주정부는 2520만달러를 합의금으로 지급했다. 이 외에도 리가 조작한 것으로 의심받는 사건은 계속 나오고 있고,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과 배상도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 리는 뉴헤이븐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소를 건립했고, 주정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과학으로 명성을 쌓은 뒤, 자신의 권위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를 악용한 사람은 우리 주변에도 있다. 광우병 괴담, 천안함 피격 사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선거 조작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매번 사회적 혼란을 부추긴 것은 전문가를 자청하는 과학자들이었다. 논문과 시뮬레이션, 통계 자료를 앞세운 이들의 주장에 정치권까지 나서 편 가르기를 부추기고 음모론을 키웠다. 진짜 과학자들의 목소리는 ‘국익 저해’, ‘기득권의 탄압’으로 몰아세웠다. 18년간 미국산 소고기로 인해 광우병에 걸린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2년이 넘게 지났지만 우리 바다의 방사성 물질 농도는 변화가 없다. 면역학 전문가라며 광우병 괴담을 직접 생산했던 한 교수는 지난달 마사회장에 취임했다.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만드는 데 앞장섰던 그가 처벌을 받기는커녕 자신의 과거 발언을 사과하거나 번복했다는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광우병 괴담은 잊히고,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과학자로만 포장된 그의 출세가 후배 과학자들의 부러움을 살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