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WBC 조별리그 경기에서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의 홈런 때 더그아웃에서 함께 기뻐하는 도미니카공화국 선수들. /AFP 연합뉴스

바야흐로 야구의 계절이다. 지난해 ‘1200만 관중 시대’를 연 한국 프로야구는 시범 경기에 역대 최다인 44만명이 입장하며 올해도 ‘흥행 대박’을 예고했다. ‘야구 종가’ 미국 메이저리그는 26일 뉴욕 양키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2026시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메이저리그를 즐기는 묘미 중 하나는 천문학적 몸값을 자랑하는 수퍼스타들의 ‘억’ 소리 나는 퍼포먼스다. 그중엔 ‘1조원의 사나이’도 있다. 후안 소토는 2024년 뉴욕 메츠와 7억6500만달러(약 1조1500억원)에 15년 계약을 맺었다. 순수 연봉 1위인 그가 올해 받는 돈만 930억원. 야수 연봉 2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블라디미르 게레로는 올 시즌 600억원을 챙긴다. 둘은 최근 도미니카공화국 유니폼을 입고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무대도 누볐다.

준결승전에서 미국에 1대2로 석패하며 결승에 오르진 못했지만, 도미니카는 한국 야구 팬들에겐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됐다. 한국이 8강전에서 호기롭게 도전장을 던진 결과는 0대10, 7회 콜드게임 패였다. 어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도미니카 야구 괴물들은 끝내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야구로 전 세계에 존재감을 각인시킨 도미니카는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다. 그 땅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능은 결코 작지 않다. 쿠바 이주민과 미군을 통해 전해진 야구는 이곳에서 국민 스포츠로 뿌리내렸고,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체계적인 아카데미 시스템과 맞물리며 거대한 인재 공급망으로 발전했다. 골목마다 아이들은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제2의 소토’를 꿈꾼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 개막 로스터에도 100명이 넘는 도미니카 선수가 이름을 올렸다.

히스파니올라 섬 지도

같은 섬, 전혀 다른 현실도 있다. 쿠바·자메이카와 푸에르토리코 사이에 있는 히스파니올라 섬은 도미니카와 아이티가 양분하고 있다. 먼저 잘 산 쪽은 서쪽의 아이티였다. 흑인 노예들이 1804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세운 아이티는 한때 커피와 설탕 생산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뒤발리에 부자(父子)의 30년 세습 독재로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2010년 대지진으로 최대 30만명이 목숨을 잃으며 ‘비극의 땅’이 됐다.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2021년 자택에서 괴한에게 피살된 이후에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갱단은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90% 이상을 장악했고 살인과 납치, 약탈이 일상이 됐다. 반면 1844년 아이티에서 독립한 도미니카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을 비교적 꾸준히 이뤄내며 카리브해의 중심 국가로 발돋움했다. 도미니카의 올해 1인당 GDP는 1만2610달러, 아이티는 2440달러(이상 IMF 기준)다.

총을 들고 아이티 포르토프랭스를 활보하는 갱단의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막장 국가’로 전락한 아이티의 현실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떠오른다. 소토가 도미니카 수도 산토도밍고가 아니라 약 300㎞ 거리의 포르토프랭스에서 태어났다면, ‘1조원의 사나이’는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결국 한 나라와 그 안에 사는 국민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땅의 크기나 위치가 아니라 사회를 움직이는 정치 리더십과 시스템이다. 한국과 북한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동안 스포츠 기자로 아이티를 언급했던 기억은 일본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가 아이티계라는 사실 정도다. 그만큼 스포츠 세상에선 존재감이 희미한 아이티도 곧 큰 무대를 앞두고 있다. 프랑스 출신 선수들이 주축이 된 아이티 축구 대표팀은 치안 문제로 남쪽으로 800㎞ 떨어진 퀴라소 등에서 홈경기를 치르면서도 작년 11월 귀중한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북중미 월드컵에서 아이티가 시원한 골을 뻥뻥 터뜨리며 오랜 고통 속에 살아가는 국민의 시름을 잠시나마 덜어주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