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가을 카이스트 대학생은 경쟁 대학인 포스텍 서버를 뚫어 세상을 발칵 뒤집어놨다. 해킹 동아리 간 경쟁이었지만 결국 40일간 구치소 생활까지 했다. 30년이 흐른 지금 그는 화장품 냄새를 맡아가며 제조 현장에 뛰어들어 ‘산업의 판’을 해킹하고 있다. 아시아 최초로 구글에 기업을 매각한 것을 포함, 벌써 여섯 번째 창업에 나선 노정석(50) 비팩토리 대표 이야기다.
그가 IT 세상의 키보드 대신 제조와 손을 잡은 이유는 명확했다. 그가 보기에 지금의 제조업은 30년 전 보안이 허술했던 서버만큼이나 비효율적인 허점투성이기 때문이다. 노 대표가 이끄는 비팩토리는 단순한 화장품 회사가 아니다. 소프트웨어(Bit)가 실체(Atom)를 장악해 가는 ‘제조 AI’의 실험실이다. 그를 만나 최근 급부상하는 제조 AI에 관한 얘기를 들어봤다.
-창업도 많이 하고 매각도 많이 했는데, 왜 또 창업에 뛰어들었나.
“일찍 성공을 맛봤지만 투자자로만 지내기엔 좀 답답했다. 다시 현장에 뛰어들기로 하면서 딱 두 가지 기준을 세웠다. 하나는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이면서 글로벌 시장이 클 것. 다른 하나는 소프트웨어가 꼭 필요한데 아직 제대로 도입되지 않은 분야일 것. 그 교차점이 바로 K-뷰티, K-패션, K-교육 같은 영역이었다. 지난 5~6년간 여러 시도를 하며 깨달은 건 앞으로 산업의 핵심 키워드는 ‘젊음의 지속성(Keep Young)’이 될 거라는 사실이다. 이제 MZ세대보다 소비력이 크고 경제 영향력이 높은 ‘영 포티’, ‘영 식스티’가 시장의 주역이 될 것이고, 그들을 위한 정교한 솔루션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 중에서 하필 제조 AI와 화장품을 결합한 이유는
“해커의 눈으로 보니 지금의 화장품 제조업은 30년 전 보안이 허술했던 서버와 비슷했다. 지난 수십 년간 수만 리터의 원료를 가마에 넣고 끓여 똑같은 제품을 찍어내는 ‘대량 생산’의 도그마에 갇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재고는 쌓이고 마케팅 비용이 제조 원가를 압도하며, 정작 소비자 개인의 피부 특성은 무시된다. 이 거대한 비효율이야말로 내가 해킹해야 할 가장 매력적인 취약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로 구현한다는 건가
“핵심은 데이터(Bit)가 물질(Atom)을 완벽하게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객의 피부 데이터가 입력되면 AI가 실시간으로 최적의 레시피를 설계하고, 이를 즉시 로봇에 명령한다. 사람이 개입할 틈 없이 단 2분 만에 ‘나만을 위한 제품’이 나오는 거다. 이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4년 전 코스맥스와 손잡고 화장품 전용 3D 프린터를 개발해 진화시키고 있다. 다만 화장품은 단순히 좋은 성분을 넣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개개인의 기호와 특성까지 반영해야 해 알고리즘 등을 더욱 정교하게 보완하는 중이다”
비팩토리는 현재 글로벌 1위 화장품 제조 기업인 코스맥스와 손을 잡고 제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중이다. 단순한 제휴를 넘어선 일종의 전략적 대전환이다.
-코스맥스와의 협업은 어떤 의미가 있나.
“코스맥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장품 레시피를 보유한 ‘데이터의 보고’다. 하지만 그 방대한 데이터는 주로 문서나 인간 전문가의 경험 속에 ‘암묵지(暗默知)’ 형태로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이 노하우를 인프라에 직접 이식하는 ‘AI 뷰티 OS(운영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예쁜 용기에 담긴 제품을 파는 수준을 넘어, 전 세계 어디서든 고객 맞춤형 제품을 즉석에서 생산해 내는 ‘AI 제조 기술국’으로 한국을 변신시킬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AI가 일자리를 뺏을 거라는 공포도 상당하지 않나.
그런 걱정은 이미 때늦은 얘기다. 이제는 ‘AI가 내 업무의 99%를 수행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모든 비즈니스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데이터 정리나 물류 최적화 같은 기술적인 ‘How(어떻게)’의 문제는 AI에 맡겨야 한다. 대신 인간 창업가는 ‘Why(왜 이 제품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철학에 집중해야 한다. 해커들이 소스코드를 공개해 인터넷 세상을 바꿨듯, 제조업의 소스코드를 AI로 공개해 누구나 창업할 수 있는 시대를 열고 싶다
-글로벌 빅테크들과의 AI 전쟁에서 우리가 승산이 있을까.
“냉정하게 말해 수백조 원을 쏟아붓는 거대 AI 모델 경쟁에서는 우리가 명함조차 내밀기 힘들다. 그렇다고 끝나는 건 아니다. 그들이 먼저 ‘화성’에 가게 두면 된다. 우리는 현실의 수많은 업무를 AI로 전환하는 실용적인 영역을 공략하면 된다. 우리에겐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기술이 있지 않나. 똑똑한 소규모 모델을 트레이닝하고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인재를 키워내는 것, 그것이 국가적으로 가장 실익이 큰 전략이다”
-후배 창업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구글에서 1년간 정규 개발자로 일한 적이 있는데 정말 중요한 걸 배웠고, 지금까지 그걸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생각과 꿈의 규모(scale)다. 구글은 지구인 전체를 상대로 한 사업 아이디어를 존중해준다. 내가 늘 지적받은 것은 “왜 작은 문제에 매달리나. 큰 시도(big bet)를 하라”였다. 큰 문제나 작은 문제나 어차피 해결하는 데 에너지 소모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꿈을 크게 꾸는 것, 그런 꿈을 키워주는 시스템이 중요할 것이다”
모니터 화면 속 가상 세계를 누비던 천재 해커의 타깃은 이제 구태의연한 산업 관행이라는 물리적 실체로 옮겨왔다. 기술이 현실의 벽을 뚫고 실현되는 ‘피지털(Phygital)’ 혁명의 최전선에서 그의 ‘마지막 해킹’은 시작된 듯 보였다.
AI 시대, ‘회사’라는 틀도 사라진다
노정석 대표는 얼마 전 자신이 이끄는 비팩토리의 엔지니어링 팀을 해체하는 실험을 단행했다. 기획자, 개발자, 매니저가 나뉘어 협업하던 과거 방식을 걷어내고 단 한 명의 리더가 AI를 동료 삼아 전체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구조로 바꾼 것이다. 그는 “나의 동료를 코딩하는 세상”이라 정의한다. 예전에는 “사람 하나 빠진다고 조직 안 망한다”는 말이 진리였으나, 이제는 “핵심 인재 하나가 빠지면 회사 자체가 사라지는 시대가 도래했다”고도 말했다.
비팩토리만 그런 게 아니다. 수만 명의 조직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거대 법인의 시대가 저물고 AI라는 무기를 장착한 ‘1인 유니콘’이 산업을 재편하는 대전환이 글로벌 기업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조직의 덩치가 곧 경쟁력이었던 시대의 종언이다.
노 대표는 “메타나 테슬라 같은 빅테크들이 핵심 인재 한 명을 데려오기 위해 수천억 원의 가치를 베팅하는 현상은 상징적”이라며 “탁월한 개인 한 명의 역량이 이미 기존 조직 전체의 생산성을 압도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이제 가치의 단위는 회사가 아닌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와 20여 년 넘게 교류해 온 노 대표는 “이런 시대에 글로벌 시장은 최초의 원맨 유니콘 탄생지로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고도 했다. 한국 특유의 빠른 적응력과 압도적인 AI 사용률은 한 명의 개인이 AI라는 ‘동료’를 거느리고 수조 원 가치의 기업을 일궈내는 현실을 앞당길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다. 결국 미래의 회사는 사람을 모으는 곳이 아니라 AI를 지렛대(레버리지) 삼아 무한히 확장하는 개인의 플랫폼으로 변모할 전망이란 얘기였다.
노정석은 누구?
노정석 비팩토리 대표는 1976년생으로 카이스트에 조기 입학해 19세에 해커로 이름을 날렸고, 1997년 보안 업체 ‘인젠’을 창업해 코스닥에 상장시켰다. 이후 2008년에는 블로그 플랫폼 ‘태터앤컴퍼니’를 아시아 기업 최초로 구글에 매각한 뒤 구글에서 1년간 정규 개발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어 앱 분석 스타트업 ‘파이브락스’를 미국 탭조이에 매각하고 VR 스튜디오를 구축하는 등 여섯 번의 창업을 모두 성공으로 이끌었다. 현재는 AI 기반 뷰티테크 기업 ‘비팩토리’를 이끌며 화장품 산업의 AI 혁신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