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길을 걸으며] [14] 손에 넣으면 잊어버리는 것들
20대 때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컵을 씻고, 커피를 내리고, 테이블을 닦으며, 혼자 노트북 가져와 일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했다. 저런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내놓을 텐데. 물론 지금은 그 시절 젊음이 가장 그립다. 며칠 전 강아지와 언덕을 달려 내려가는데 올라오던 할머니가 말한다. “나도 강아지가 있었어요, 16년 살다 갔는데, 그때 정말 행복했는데, 그땐 그걸 몰랐어요, 행복하세요.” 순간 울컥했다. 이제 창문에 낀 얼음이 다 녹고,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겨울 아침 햇살 아래 이렇게 아름다운 시절이 흐르고 있어요. 고요히 하늘을 가르는 새 한 마리가 우리 모두를 쓰다듬는다.
[태평로] 코스피 5000 시대의 ‘헬조선’
고부군수 조병갑은 1892년 고부에 부임했는데, 어떤 연유에선지 바로 다음 해에 익산군수로 전임(轉任)된다. 막 터를 잡고 치부를 시작하려던 차에 새 임지로 발령이 나자, 이를 되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수단은 로비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을 찾아간다. 이미 조병갑에게 받아먹은 것이 많던 김문현은 조정에 유임 요청을 보내 조병갑을 다시 고부군수에 앉힌다. 고부에 복귀하기까지 한 달여가 걸렸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사이 무려 여섯 명의 후임자가 고부에 부임했다가 물러났다(신복룡,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당시 매관매직이 이 정도로 심했다. 만경평야 한가운데 노른자위 땅에 군수 자리가 나자 비집고 들어오려 한 이가 많았던 것이다. 그 벼슬 장사를 조정이 했다. 망한 나라 ‘구한(舊韓)’의 말기가 이랬다.
조병갑을 떠올린 건 ‘구청장’을 노렸던 김경 전 서울시의원 때문이다. 그가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포함해 일부 여당 실세 의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는 일들이 통화 녹음 형태로 있다고 한다. 2023년 7월 강서구청장 출마가 무산돼 “돈을 너무 많이 썼다, 아깝다”라고 했을 때 심정은 고부에서 하루아침에 익산으로 발령 난 조병갑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기자의 시각] 일용직에 떠넘긴 ‘안전 책임’
“다시 말하는데 ‘업무에 지장 없음’으로는 부족합니다. ‘건설업 근무 가능’이라고 고쳐 오세요.”
중대재해처벌법 도입 이후 건설사들이 일용직 근로자에게 이런 ‘확약’을 요구하고 있다. 법의 취지는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자는 데 있지만, 현실은 달랐다. 법의 부담이 가장 약한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책임이 전가되고, 현장 안전 대신 사고 위험이 없는 노동자만 골라 쓰는 ‘선별 채용’ 꼼수가 횡행하고 있다.
[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325] ‘불멍’의 순간
사람을 싫어해서 얼어 죽이려 했던 제우스에 대항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 불의 구성에서 불꽃은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다. 노출된 공간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은 따뜻함과 더불어 경이로움, 편안함과 위로, 낭만적 설렘을 준다. 불꽃과 더불어 그 빛에 어렴풋이 비치는 물체의 윤곽, 흔들리는 그림자 또한 메아리와 같은 아름다움이다. 벽난로나 캠프파이어, 식탁 위의 양초로 불을 나누는 특별한 경험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공통의 언어다. 근래 불멍이 유행하는 것도 이런 특별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따뜻한 불꽃이 그리운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