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는데 ‘업무에 지장 없음’으로는 부족합니다. ‘건설업 근무 가능’이라고 고쳐 오세요.”
중대재해처벌법 도입 이후 건설사들이 일용직 근로자에게 이런 ‘확약’을 요구하고 있다. 법의 취지는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자는 데 있지만, 현실은 달랐다. 법의 부담이 가장 약한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책임이 전가되고, 현장 안전 대신 사고 위험이 없는 노동자만 골라 쓰는 ‘선별 채용’ 꼼수가 횡행하고 있다.
수도권의 한 검진센터장은 “건설사들이 사고 책임을 면하려고 ‘노동자에게 아무 문제없다’는 의료진 진단을 받아오라고 강요하고 있다”고 전했다. 안전한 작업 환경을 구축하는 대신, 사고가 나지 않을 만한 이들만 골라 채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가 의학적으로 “지장 없다”고 판단해도, 기업은 법적 리스크를 피하려 ‘무결점 보증’이 없으면 문전박대하기 일쑤다. 하루 벌어 하루 버티는 노동자들이 “건강하다, 제발 일하게 해 달라”고 호소해도 소용없다.
법은 기업의 무거운 책임을 강조했지만 현장을 보니 그 책임은 일용직 근로자들이 다 짊어지고 있었다. 기업은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고 노동자를 더 쥐어짠다. 회피 비용을 약자에게 청구하는 것도 문제다. 소견서 발급비 3만원에 재검을 받느라 공친 일당 15만원을 합치면, 노동자는 18만원을 허공에 날려야 한다. 병원 창구에서 “종이 한 장 받으려다 일당 날렸다”는 거친 항의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새벽 4시 서울 남구로역 인력 시장에서는 “일당을 깎아서라도 태워달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빈손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경력 30년의 60대 노동자는 “이젠 영세 업체조차 60세가 넘으면 받아주질 않는다”고 한탄했다. ‘고령자는 안전 교육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황당한 논리까지 동원해 채용을 막고 있었다. 본지가 만난 숙련공들은 “노하우가 있어도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 비참하다”고 했다.
새벽 5시 30분, 그곳에는 고성과 체념이 뒤엉켜 있었다. “8만원에 가지 마, 이건 아니잖아!” 날카로운 고함이 새벽 공기를 갈랐다. 제 살 깎아 먹기식 ‘단가 후려치기’ 전쟁이다. 싸움에 끼지 못한 이들은 “오늘도 공쳤다”며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절박함엔 하한선이 없다. 새벽 4시 10분에 나왔다는 50대 노동자는 “일당을 반만 줘도 나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거절당한 이들이 내뿜는 희뿌연 담배 연기만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정부는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현장은 여전히 ‘책임 떠넘기기 전쟁’ 중이다. “일주일에 반이라도 현장에 나가고 싶다” “쌈박질 그만하고 제발 경제 좀 살려달라”는 외침은 생존의 절규에 가까웠다. 정부와 기업은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현장과 노동자를 위한 진정성 있는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