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평양에 장기간 체류했던 기업인에게 들은 얘기다. 평양에서 딱 한 달을 묵고 일어난 어느 날 아침 양치질을 하다 북한 체제 선전 가요를 흥얼거리고 있는 모습에 스스로 놀랐다고 한다. 평생 북한 당국의 세뇌를 강요받는 북한 주민들은 오죽하겠느냐는 것이다. 2017년 36년 만에 열린 제7차 당대회 때 4000자가 넘는 분량의 김정은 찬양 글을 암송해야 했던 당시 만 7~13세 ‘소년단’ 아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0일 함경북도 경성군 온포근로자휴양소 준공식에 참석해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조선중앙TV 연합뉴스

김일성은 즉석 사진기를 들고 산골 오지 학교를 찾아 붉은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소년단’ 아이들 사진을 직접 찍어주고 함께 기념 촬영도 했다. 북한 기록 영화 ‘우리 수령님’은 이런 김일성을 “온 나라의 어버이”라고 찬양한다. 김일성은 정작 손자인 김정은과는 ‘다정한 투샷’을 찍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사진이 있었다면 북한이 벌써 공개했을 것이다.

인민들을 위한 일이라며 할아버지가 생전에 지내던 사저를 싹 밀어버리고 ‘조국통일’ 유훈을 뒤집고 나선 것도 어쩌면 재일 교포 출신 무용수인 어머니를 김씨 일가 며느리로 인정해 주지 않은 할아버지에 대한 분풀이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김정은 시대의 변화를 “지난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 발전”으로 치켜세우고 락원포 사람들이 경제력이 약해 그동안 동네 이름을 부르기도 부끄러웠다는 글이 노동신문에 실리는 것도 ‘선대 돌려 까기’ 방식의 김정은 우상화로 읽힌다.

조선노동당 규약 전문은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당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김정은이 물려받은 건 ‘혈통’뿐인데, 선대의 최대 유훈인 ‘통일’도 폐기하고 선대를 뛰어넘는 가시적 성과를 만들어냈으니 진짜 위대한 건 선대가 아니라 김정은이어야 한다. 거추장스러운 선대는 이미 치웠고, 남은 건 북한 주민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남한뿐이다.

‘적대적 두 국가론’은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말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엄포다. 서로 신경 끄고 지내자면서도 남한 언론이 보도하는 대통령과 주요 인사들의 발언, 심지어 정부 당국자의 말까지 일일이 걸고넘어지는 건 어떻게든 남한 정부를 길들이려는 가스라이팅이다. 북한 주민들도 알기 쉬운 말로 바꾸면 ‘정신을 말려 죽이는 일’쯤 되겠다.

김정은은 집권 첫해인 2012년 신년사에서 국가 발전 목표로 ‘사회주의 문명국 건설’을 제시했다. 북한 내각의 내부 문건엔 2020년까지 양말 3500만 켤레, 질 좋은 신발 6000만 켤레를 생산해 인구 1인당 2~3켤레 신발이 차례지도록(돌아가도록) 한다는 목표가 포함돼 있다. 얼마 전 김정은이 참석한 백두산 인근 삼지연 호텔 준공식에 동원된 북한 여성들은 한겨울 추운 날씨에 목도리와 장갑도 없이 봄·가을에나 신는 얇은 살색 스타킹 차림으로 최고 지도자를 맞이했다. 문명국 여성들은 한겨울에 그런 차림으로 몸을 얼게 하지 않는다.

5년 전 8차 당 대회 때 김정은은 경제 실패를 자인하고 장장 9시간 동안 연설했다. 이제 지난 5년의 성과를 평가하고 향후 5년간의 대내외 정책 방향을 확정하게 될 제9차 당 대회가 코앞이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의 삶은 여전히 “만날 이 모양 이 꼴”에 머물러 있다. 그 책임을 돌리기에 남한은 만만한 상대다. 하지만 ‘자력 갱생’ 구호만 외치며 체제 리더십 유지를 위해 책임은 외부로 전가하는 대남 가스라이팅을 지속하는 한, 북한은 결코 진정한 문명국이 될 수 없다.

핵·미사일 기술 고도화만 이루면 뭐 하나. 주민들의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문명국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제9차 당 대회는 주민들의 실질적 삶을 직시하고 핵 무력 강화를 우선하는 근본적 정책 기조가 변화하는 기회가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