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보리차 끓여 마시던 90년대, 500mL 생수병을 사 들고 출근하는 X세대 후배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 물병이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까.’ 그 세상은 육체와 욕망의 시대로, 마침내 ‘자기애 전염병’의 시대로 이어졌다. 입에 좋고 몸에 좋고 기분 좋으면 오케이. 객관은 사라지고, 오로지 호오(好惡)가 가치관이 됐다. 나의 안위, 내 자식, 내 편만이 ‘절대 선’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 먹고사니즘, 혓바닥 성불시대 같은 게 그 현상이다.
얼마 전 모임에서 유명한 한의사가 말했다. “인공지능 대폭발 시대가 5년 내 도래합니다. 박사 학위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겁니다.” 왁자하게 웃고 그 한의사의 흑염소진액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는 ‘뻥쟁이’일까. 아니다.
과학의 미래를 낙관하는 과학자의 선두에 레이 커즈와일이 있다. 공학 천재이자 미래학자다. 2005년 베스트셀러 ‘특이점(Singularity)이 온다’, 2024년에 나온 후속편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된다’를 건성건성 읽고, 그의 강연에서 가장 낙관적인 말만 추리면, 대충 그렇게 된다. 생명공학과 나노봇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물리적 1년이 ‘늙어가는 1년’이 아니라 역노화 신기술이 나오는 1년이다. 사는 만큼 수명을 늘릴 수 있다. 기술 예측만 맞아떨어진다면, 대략 5년 후부터 그런 세상이 온다는 주장이다. 커즈와일이 방송이나 강연에서 자주 말한다. “죽지만 말라(Don’t die).”
이번 세기의 개인주의와 힐링 열풍을 돌이켜보면, 2018년 BTS의 노래 ‘러브 유어셀프’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자기 긍정의 메시지를 전한 이 아이돌 그룹은 ‘MZ세대의 틱낫한’에 등극했다. 자기애와 자존감이 시대의 복음이 된 것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병적 자존감’ ‘극단의 이기주의’로 변질되기 쉽다는 거다.
몸을 ‘옷’처럼 바꿔 입는 시대와 지금의 ‘이기주의 역병’이 합쳐지면 어떤 세상이 될까.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다. 벌써 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지금처럼 염치를 모르는 정치인들이 지배종이 된 적은 없었다. 정치인들 낯이 코뿔소 가죽만큼 두껍다. 우리나라만 보자. 기이한 계엄으로 자신은 물론 진영 자체를 궤멸 직전으로 몰고 간 전직 대통령은 사과와 희생을 모른다. 새 대통령은 범죄 혐의를 가리려는 듯 상상 초월 행각을 벌이면서도 당당하다. 동호회 회장을 했어도 탄핵당했을 인격체들이 카메라만 돌면 ‘의원님’ 코스프레를 한다. 전과자 정치인들이 검사와 판사를 겁박한다. 유권자도 똑같다. ‘팬클럽’의 일원이 되어 ‘정치 아이돌’을 위해 제 인격을 바닥에 패대기친다. 사회는 뭐가 다른가. 할아버지는 노욕, 아버지는 탐욕, 자식은 과욕이다. 이 고리를 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단명 시대’에는 환갑만 되어도 보료에 눕듯이 앉아 손주를 봤다. 먹을 것 앞에서, 이익 앞에서 관심이 없는 듯 행동했다. 일찍 은퇴해 후학에게 길을 터줬고, 평생 지조를 꺾어가며 훼절하는 일도 적었다.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 조건, 사회적 압박이 그랬다. 생수를 사 마시는 시대가 되었듯, 초장수는 필연이다. 과학은 인간에게 ‘생존 본능’에만 충실한 동물이 되라고 꼬드긴다.
어느 때보다 ‘체면과 염치’가 절실해진다. 한때 ‘위선’이라 비난받던 어른의 태도. 돌이켜 보니 그건 ‘문명’의 흔적이었다. 초장수 시대, 동물적 본능으로부터 공동체를 방어하는 건 문명의 힘일 것이다. 그 문명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