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 50년'을 맞은 강천석(왼쪽) 본지 고문이 지난 5일 조선일보에서 언론학자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유튜브의 포로가 된 정치를 개탄한 두 사람은 "정확성과 속도, 현장으로 무장한 불편부당의 정신만이 편협과 반지성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장련성 기자

마이산 돌탑처럼 솟은 책 더미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정진석 교수가 어깨를 좁히고 들어섰다. “소문으로만 듣던 지식의 창고군요.” 노학자의 지팡이를 받아 든 강천석 고문이 멋쩍게 웃었다. “난잡한 헌책방일 뿐입니다.”

‘신문은 역사의 바다’라고 믿는 언론학자와 ‘권력에 이의 있소’라고 손 드는 게 언론의 출발이라 믿는 ‘50년 기자’의 문답. 편협의 정치, 유튜브의 포로가 되어가는 반(反)지성의 시대에 정통 언론이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두 노장의 어깨 너머로 가을이 졌다.

◇편협의 정치, 反지성의 시대

정진석(이하 정): “책을 많이 보신다더니 과연.”

강천석(이하 강): “일본 특파원 시절 모은 책을 비롯해 1만권은 파주 컨테이너로 보내고, 얼마 전 80년대 책을 이삼천 권 버렸는데도 이 모양입니다.”

정: “박람강기(博覽强記)란 말이 무색해진 AI 시대에 연구자에게도 책은 평생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 애물단지이죠.”

강: “매달 봉급의 5%를 들여 사 모은 책인데, 버리기 아까워 다시 펼쳐보니 내가 쓴 메모들과 함께 타다 남은 담배가 꽂혀 있어요. 30대 중반까지는 폭탄주 먹고 귀가해도 책을 읽다 잔 모양입니다(웃음). 그 무렵 읽은 책이 내 직업과 인생에 뭔가 보탬은 되었겠지요.”

정: “1975년에 기자가 됐더군요.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낸 유광렬 선생의 기자 50년 인터뷰를 제가 했는데, 요즘은 기자 50년을 맞는 일이 흔치 않은 듯합니다.”

강: “선배 한 분이 소주 한잔 사주시며 ‘그래 봤자 월급봉투 600번 받았다는 거 아니냐’ 하더군요. 일본 NHK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지요. 정년을 맞은 남자에게 아내가 선물을 줘요. 해외여행권도, 골프 회원권도 아닌, 남편이 수십 년간 받아온 월급봉투를 다리미로 반듯이 다린 꾸러미였지요. 남편이 무너지더군요(웃음).”

정: “70년대 중반만 해도 다른 신문들이 앞서고, 조선일보는 뒤쫓던 추격자였지요?”

강: “수습기자로 남대문 경찰서를 출입하는데 경찰서장이 곰탕집에서 기자들에게 밥을 산다고 해요. 가운데 자리가 비어 거기 앉으니 경무과장이 쫓아와 귀엣말로 서장과 마주보는 자리는 다른 언론사 자리니 옮기라는 거예요. 화가 몹시 나더군요(웃음).”

정: “결국 신문의 시대를 조선일보가 열지요. 1975년 이후 5년마다 평균 50만부씩 늘고, 1992년에 200만부를 돌파하고, 2000년 240만부에 육박합니다. ‘한국 언론 연대기’를 집필하면서 김대중 정권이 세무조사로 조선일보를 괴롭힐 때 나온 자료를 보니, 조선일보가 낸 세금이 KBS, MBC 등 주요 언론사를 합친 금액보다 많더군요.”

강: “앞세대 선배 기자들이 개척한 길을 저희는 쏜살같이 달렸지요. 우리 경제가 풍요로 가는 길목에서 수혜 받은 측면도 있어요. 신문 하나쯤은 크게 구애받지 않고 구독할 수 있는 집이 많아진 거니까요.”

마이산 돌탑처럼 책더미로 가득한 집필실에서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와 대담하는 강천석 본지 고문. 정교수는 '한국 언론 연대기'를 집대성한 언론사학자다. /장련성 기자

◇여의도에 ‘기적’은 없다

정: “1975년은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해였지요? 나라 밖에서는 장개석 총통이 죽고 이듬해에는 캄보디아 대학살이 일어나고요.”

강: “사회부 기자는 밤 10시부터 경찰서를 도는데, 독립문 옆 검문소를 지날 때 군인이 제 턱 밑에 총구를 들이대더군요. 쇳덩이의 차가운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80년 비상계엄 직후엔 기사 검열이 극에 달했지요. 제가 쓴 원고의 9장이 잘려나가고 3장만 남았길래 검열단 책임자를 찾아가 이건 과도하지 않으냐 따졌어요. 나중에 보니 그이가 언론인 숙청 명단을 작성한 인물이더군요. 단두대 앞에 다녀온 셈이죠(웃음).”

정: “정치부 기자만 45년 했으니 박정희 대통령 이후 여러 정권의 흥망을 목격했겠군요.”

강: “정권이 무너지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국민 마음에 ‘야, 이건 도가 지나치다’라는 생각이 쌓이면 얼마 안 가 무너졌습니다. 유신 정권이 야당 총재를 제명했을 때, 박종철군이 죽었을 때, 문재인 정권이 5년 내내 적폐청산 굿을 펼쳤을 때가 대표적이지요. 야당을 말살하면 국민이 직접 정권에 저항하고, 혁명으로 이어져요. 현재의 위정자들도 예외가 아니죠. 정청래 대표가 야당을 정당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하는 걸 보고 도가 지나치다고 느낀 국민이 많을 겁니다.”

정: “여순 사건 등 대통령의 역사 인식도 매우 심각하더군요.”

강: “현 정권 사람들이 ‘나라가 민주화가 되고 나서 민주화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라 공부가 덜 된 거지요. 정치부 시절 5년마다 교도소 면회를 갔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 인사들이 대거 감옥에 갔지요. 한번은 여성 교도관이 면회를 마치고 떠나는 제게 인사를 하더군요. ‘5년 후에 또 뵙겠네요!’”

정: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한국 정치의 비극이지요.”

강: “외신은 ‘한강의 기적’을 예찬하지만 ‘여의도 기적’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어요. 매우 이상한 기적은 하나 있지요. 외국에선 정치자금법이니 뇌물이니 해서 교도소에 들어가면 그날로 정치생명이 끝나는데 한국의 정치인은 예수님도 아니면서 계속해서 부활합니다. 정치적 사면을 통해서.”

신문기자 50년을 맞은 강천석 조선일보 고문은 "도(度) 넘었다는 민심이 쌓이면 무쇠 정권도 무너진다"고 했다./장련성 기자

◇눈물 젖은 역사를 가르치라

정: “2003년부터 쓰신 ‘강천석 칼럼’은 언제고 최고 권력을 겨냥했더군요.”

강: “칼럼 제목에 유독 대통령이 많으니 누가 그래요. 너는 국무총리는 사람으로 안 보이냐?”

정: “핍박은 없었습니까?”

강: “총선에서 야당에 대통령과 여당을 견제할 의석을 주라고 썼다 해서 검찰에 불려 간 적이 있지요. 은행 계좌도 여러 번 털리고요.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국세청장에게 ‘주인 모르게 남의 집에 맨날 들락거렸으면 금일봉이라도 놓고 가야 하는 것 아니오?’ 했지요.”

정: “대통령 아들의 실명을 박아 칼럼을 쓴 적도 있지요?”

강: “YS 때인데 공보처 장관이 이른 새벽에 전화했어요. 대통령이 엄청 화가 났다고. 그런데 정치를 오래한 대통령들은 화가 나도 뒤끝이 별로 없어요. YS의 힘은 질문력에 있었지요. 애송이 기자에게도 국가 현안을 물을 만큼. 당선자 시절, 문민 대통령이니 3군 사관학교 졸업식에 가지 않을 거라는 보도가 잇따라서, 제가 서울대 졸업식은 안 가도 3군 사관학교 졸업식엔 꼭 가야 한다고 했더니 두말없이 받아들이더군요.”

정: “DJ는 어땠습니까?”

강: “김대중 대통령은 진보인데도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구식 양반 같은 면이 있어요. 요즘 민주당 수뇌부처럼 버르장머리 없는 정치인들을 굉장히 싫어했지요.”

정: “‘눈물 젖은 역사를 가르치라’는 제목의 칼럼은 지금도 회자됩니다.”

강: “노무현 정권이 박정희를 폄훼할 때죠. 1964년 박통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만났을 때 ‘우리 후대에는 이런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는 연설을 하다가 눈물을 쏟았다는 일화를 적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 이야기를 모르는 국민이 많아서 반향이 컸지요. ‘나도 울었다’는 내용의 독자 편지들, 고깃근 보낸 독자도 있고요(웃음).”

정: “김건희 여사 문제는 세 차례나 칼럼으로 지적했더군요. 탄핵 과정에서 조선일보 논조가 윤석열 대통령 지지층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강: “제가 칼럼으로 대통령 부인의 문제를 지적한 건 처음이에요. 특별감찰관 임명해라, 부인 단속해라, 부인 측근들 내보내라고 썼는데도 허사로 끝났지요. 탄핵 정국에서는 조선일보 사시인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신을 지키려 했습니다. 비상계엄에 놀란 건 진짜 보수주의자들이었어요.”

정: “조선일보의 힘은 최석채, 선우휘, 김대중, 그리고 강천석 칼럼으로 이어지는 전통에 있다고 봅니다.”

강: “제가 그 전통을 잇는다고 하기엔 너무 무겁고 버거운 선배들입니다. 그런데 역대 주필들 칼럼엔 일관된 역사관이 있어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엄청난 행운이고, 6·25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켰으며, 4·19로 정의를 바로 세웠고, 5·16은 시민의 자유를 제약하는 정치 변혁이었지만 민주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역사관이죠. 노태우·김영삼·김대중도 저마다의 시대적 과제와 대결해 길을 뚫었어요. 조선일보는 이 역사관의 토대 위에서 좌우를 불문하고 최고 권력을 비판했지만 그 바닥엔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고 봅니다. 간섭을 덜할수록 신문이 좋아지더라는 사주 3대의 체험적 언론관이 뒷받쳐줬고요.”

'한국 언론 연대기'를 펴낸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신문은 거대한 역사의 바다"라며, "유튜브 등 뉴미디어 전성시대라고 하지만 '기록하는 지사(志士)'로서의 기자의 사명과 역할은 보석처럼 빛날 것"이라고 했다. /장련성 기자

◇권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정: “그러나 2000년 이후 종이 신문은 뉴미디어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듭니다.”

강: “결국은 정확성과 속도, 현장감으로 승부를 걸어야 해요. ‘쾌감’을 파는 뉴미디어와 사실을 바탕으로 ‘판단력’을 제공하는 정통 미디어의 싸움이 되겠지요.”

정: “정보의 홍수 속에 팩트 체크가 언론의 주 임무가 됐지만 가짜 뉴스의 확산을 막기엔 역부족입니다. 김어준TV는 정치가 유튜브의 포로가 된 사례고요.”

강: “뉴욕타임스가 100년을 살아남은 비결은 ‘Without fear, without favor(권력에 대한 두려움도, 편애도 없이)’였지요. 김어준 유튜브에선 자기편만 무대에 오르고 자기편만 질문하고 자기편만 박수를 보내요. 그게 언론인가요? 유튜브와 한 몸이 된 정치는 낭떠러지에서 구르다 파탄이 나고 말 것입니다.”

정: “한국 언론사는 정치사이자 독립운동사이며 문화사입니다. 이승만을 비롯해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 같은 정치 거물들, 이광수 염상섭 같은 소설가들이 언론인이었죠. 그래서 신문기자는 ‘지사’로도 불렸고, ‘월급쟁이’란 말은 최고의 모욕이었지요.

강: “9·11 때 불기둥 속으로 걸어 들어간 두 직종이 소방관과 기자입니다. 지사는 못 돼도 그런 역사의 현장을 지키는 기자 정신은 이어지리라 봅니다.”

정: “왜 기자가 되었습니까?”

강: “어릴 때 우리 집은 조선일보, 뒷집은 한국일보, 앞집은 동아일보를 봤어요. 신문에서 처칠과 맥아더 얘기를 읽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죠. 나중에 의사가 된 형님들이 저놈은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신문만 본다고 하셨는데, 운명이 됐지요.”

정: “보수 언론에서 호남 출신 주필로 글을 쓴다는 건 어떤 것입니까?”

강: “노무현 대통령을 해수부 장관 시절 처음 만났는데 첫마디가 ‘강 국장은 조선일보에서 비주류지요?’ 해요. 그래서 ‘당신은 DJ 정부에서 비주류인가요?’ 물었지요. 당황하더군요.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 하면 주인 되는 것 아니냐, 당신이나 나나 지금 자리에서 좋은 일 합시다’ 했습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에 맞서는데 상당한 인내심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건 맞아요. 그때마다 작고한 방우영 회장께서 말씀하셨죠. ‘야, 너만 고달프냐? 나 같은 피란민도 외롭다’, 하하!”

☞강천석

1948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일고,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75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주일 특파원, 사회부장, 정치부장, 국제부장을 거쳐 편집국장, 주필을 지냈다. 2003년부터 ‘강천석 칼럼’을 쓰고 있다. 장지연상, 서재필 언론상을 받았다.

☞정진석

1939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런던정경대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부터 한국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제하 한국 언론 투쟁사’를 시작으로 저서 30권을 썼다. 최근 ‘한국언론연대기’를 펴냈다.

정리=김윤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