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원전 수주를 둘러싸고 계약이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작성됐다며, 불공정 계약 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 논란은 국제적으로 비밀 준수 의무 조항이 엄격한 ‘원전 계약서’의 일부 내용이 이례적으로 유출된 것이다. 비밀 준수 의무를 위반할 경우 자칫 국제 소송전으로 번질 수 있어 “반박하려 해도 쉽지 않다”는 하소연도 들린다. 본지는 체코 원전 수주전을 이끈 다수의 관계자들을 만나 수주 과정의 숨은 얘기들을 들어봤다. 취재에 응한 이들은 A, B, C, D 등 이니셜로 처리했고 아주 민감한 부분은 제외했다. 증언 속엔 수주 당시 난항의 순간들과 우리가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적극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정들도 담겨 있다. 물론 원전 수주를 이끈 이들의 입장이 반영된 내용이다.
2018년 9월 극비리에 한수원 주도로 팀이 꾸려졌다. 팀명은 ‘팀 코리아’. 정식 입찰 공고도 나지 않았던 체코 원전의 입찰 전담 조직이었다. 현장 리더였던 장현승(49) 한수원 체코·폴란드사업실장은 2017년 10월 열렸던 ‘신고리 5·6호기 공론 조사 종합 토론회’의 마지막 발표자였다. ‘탈원전’의 광풍 속에서 신고리 5·6호기(현 새울 3·4호기) 건설 중단이냐, 재개냐는 운명이 걸린 자리였다. 그는 “지금 체코 원전 특사가 방한 중인데, 우리 원전이 안전하지 않다면 체코와 같은 나라가 왜 관심을 갖겠는가”라며 호소했다. 결국 원전 유지가 결정됐다. 꺼져가던 K원전에 희망의 불씨가 살아 남는 순간이었다. 당시 그가 언급한 체코 원전 특사의 방한 목적이 바로 이번 수주한 원전을 맡길 업체 찾기였다.
◇아무도 주목 않았던 도전
2022년 3월. 체코전력공사는 두코바니 5호기의 국제 공개입찰 공고를 냈다. 한수원과 함께 프랑스 EDF,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제출했다. A는 “당시 프랑스 관계자들은 ‘한국이 왜 여기서 나와’라는 반응이었다”고 전했다. 프랑스 EDF에 유럽 시장은 자존심이 걸린 안방이었다. 특히 EU 지역 원전 신설은 EU의 각종 원전 관련 위원회를 거쳐야 하는데, 대부분 프랑스 원전 관계자들이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있어 한국의 도전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B의 전언. “우리는 지금까지 원전 20기 이상을 지어오면서 정해진 시간과 예산 안에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 ‘온 타임 온 버짓(On time On budget)’ 능력에선 세계 최고란 점을 체코 당국에 거듭 강조했고, 이게 먹히기 시작했다”.
◇탈락한 미국과 프랑스의 엄청난 반발
2024년 1월, 체코 당국은 1차로 미국 웨스팅하우스에 대해 ‘조건 미충족’을 이유로 탈락시켰다. 웨스팅하우스 측은 “한국은 ‘우리 원천 기술을 사용해 자격이 없다’”며 소송전 불사를 외치며 장외투쟁에 나섰다. 법적 다툼의 여지는 있지만, 우리가 웨스팅하우스의 원천 기술을 활용했기에 수주전에서 큰 약점이 될 수 있었다. 최종 탈락한 프랑스 EDF는 더 집요하고 거칠었다. 체코 반독점 당국에 “한수원이 투명성과 공정거래 원칙을 안 지켰다”며 이의 신청을 했다가 ‘기각’ 당하자, 법원에 계약 금지 가처분 소송까지 냈다. 계약 서명일 하루 전인 5월 6일 법원이 이를 수용하면서, 한국 대표단이 서명식 참석을 위해 체코로 날아가는 도중에 계약은 중단돼 버렸다. 결국 체코 법원이 한수원 손을 들어줬고, 한 달여 만에 정식 계약을 했다.
D는 “체코는 처음부터 가격 경쟁력이 월등한 한국을 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문제는 원전 수주가 경제성만 따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안보 문제와 국제정치의 역학 관계가 종합적으로 작용한다. 체코 입장에선 미국은 물론 EU의 맹주인 프랑스 역시 가볍게 볼 수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마크롱 대통령이 두 번 이상 원전 수주전을 지원하러 체코로 날아올 정도로 외교적 공세도 거셌다. E는 “체코가 1차로 미국을 탈락시켜 한국과 프랑스 2파전으로 간 뒤 한국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손을 잡도록 해 프랑스 반발도 약화시키려는 전술을 폈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한국 측이 웨스팅하우스에 상당한 양보를 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란 얘기다. 물론 원천 기술이 없는 한국으로선 웨스팅하우스에 상당 부분 양보한 뒤, 함께 사업을 따내는 방식이 크게 나쁠 것도 없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미국과 원전 동맹까지 맺어
체코 수주전에서 우리가 얻은 소득 중 하나는 한미 원전 동맹이다. 지난 1월 한수원과 한전, 미국 웨스팅하우스는 일제히 보도자료를 내고 “한·미 양측이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협력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여기엔 “웨스팅 하우스는 한전·한수원과 협력해 현재 진행 중인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할 것”이란 문구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일인 1월 20일 직전에 이뤄진 점도 주목할 만하다. E씨는 “우리로선 원천 기술이 없는 약점이 있는 만큼 협상에 더욱 까다로운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기 전 마무리하겠다는 전략도 포함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미 원전 동맹의 핵심 사항 중 하나가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가 합작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웨스팅하우스의 원천 기술과 세계 최고 수준의 시공 능력의 한국 측이 손을 잡으면 제3국 시장 진출에 용이할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안건은 최근 양측이 구체적인 조건 등을 놓고 협의를 이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F는 “합작 구상이 성사된다면 향후 10년간 1000조원(미 상무부 추산)에 이르는 세계 원전 시장에서 한·미 양국이 힘을 합쳐, 프랑스·러시아·중국 등과 본격적인 4파전을 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며 “미국 고위 인사가 ‘이왕이면 미국 원전 시장부터 함께 하자’고 제안해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미국 원전 시장 진출은 K원전의 숙원이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체코 원전 수주전의 관계자들은 ‘진상 조사’란 이름으로 기관에 불려갈 처지에 몰렸다. 취재 중 만난 한 관계자가 쏟아낸 말로 맺는다. “원전 수출 하나 따내려면 10년 가까이 걸립니다. 자기 커리어를 쌓을 핵심 기간을 프로젝트 하나에 쏟아 붓는 것이죠. 그렇게 인생을 거는 일인데, 이렇게 ‘정치적 공격’을 한다면 앞으로 누가 원전 수출에 나서려 할까요”.
핵심 5% 자립 못해 웨스팅하우스와 울며 겨자 먹기로 합작
체코 원전 수주전처럼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몽니’를 부린 경우는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전례를 찾기 힘들다. 왜 한국 경우에만 일어난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원천 기술 때문이다. 지금까지 원전 수출국은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캐나다에 우리까지 단 6국뿐이다. 미국은 대표적 원자로 모델인 가압 경수로(PWR) 관련 원천 기술을 갖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독자 원천 기술을 갖춘 데다 미국의 통제 밖이고, 프랑스는 미국에서 독자 기술로 인정받았으며, 캐나다는 경수로가 아닌 중수로 방식이다. 1966년부터 상업용 원전을 가동 중인 일본은 아직 독자 원전 수출 경험은 없다. 한국만 원천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수출에 나선 셈이다. 원천 기술 없이 원전을 수출하려면, 지식재산권 없이 제품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수주 때마다 소송전에 시달릴 소지가 있다. 웨스팅하우스가 “한국 원전은 우리 기술을 베낀 짝퉁”이라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형 원전(APR-1400)은 무엇이냐는 의문이 남는다. 그동안 알려진 바와 달리 APR-1400은 완벽한 독자 기술이 아니다. 최근 한수원 사장이 국회에 나와 공개적으로 시인한 부분이다. APR-1400은 상당한 기술 자립의 성과를 거뒀지만 ’95% 수준의 자립’이란 게 학계의 다수 의견이다. 웨스팅하우스와 분쟁의 핵심도 APR-1400의 핵심 기술이 웨스팅하우스의 원천 기술인 ‘System 80+’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