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은 군부 독재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1980년대 중반 북한의 주체사상과 만나 분단과 사회 불평등을 포함한 모든 악의 근원이 미국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80년대 후반 들어 본격적 반미(反美)·친북(親北) 노선이 등장했고, 북한에 간첩으로 포섭되는 일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1985년 5월 23일, 72시간 동안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는 민주화 운동과 반미 운동의 과도기에 벌어진 사건이다. 서울 다섯 대학 73명이 점거 농성에 참여했고, 당시 운동권 지도부 다수가 직간접으로 연계돼 있었다. 대학생들은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군부의 광주 무력 진압은 미국의 묵인으로 가능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들의 주장을 증명할 근거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 사건은 당시까지 금기였던 80년 광주를 세상에 환기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외교 공관 점거라는 충격 요법은 성공했지만 광주와 미국을 연계한 것은 오류였다.
사건 직후 점거 참여 73명 중 함운경(서울대),신정훈(고려대),이정훈(고려대) 등 25명이 구속됐고, 김민석(서울대),허인회(고려대),박선원(연세대),고진화(성균관대) 등 10여 명은 배후 명목으로 수배됐다. 점거 당사자 중 일부는 20년, 30년 때마다 만났지만 올해는 별도 모임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 민주당 성향이지만 사건 핵심이었던 함운경이 국민의힘에 들어가 분위기가 서먹해졌다고 한다. 20대 대학생들은 이제 60대 중반이 됐다.
◇그때 그 사람들, 지금 이 사람들
구속자들은 점거 직접 참여자와 총학생회장,삼민투 위원장 등 배후 인물로 나뉜다. 국회의원 등 정치권 인사가 많고, 그중 대부분은 민주당 또는 친민주당 계열이다. 점거에 참여한 신정훈은 나주시장을 거쳐 현재 민주당 소속 국회 행안위원장이다. 이정훈은 민노당 중앙위원이었던 2006년 ‘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돼 국보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2021년 다시 북한 공작원과 접촉해 진보 진영 동향을 보고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아직도 1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함운경은 작년 총선 때 국민의힘 소속으로 정청래 민주당 신임 대표의 서울 마포을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법원 판결문과 관련자들에 따르면 미 문화원 점거를 최초 모의한 건 함운경,이정훈,박선원,고진화 4명이었다. 함운경은 “나와 이정훈은 점거에 직접 참여하고 박선원과 고진화는 밖에 남아 수습을 맡기로 역할을 분담했다”고 말했다. 박선원은 노무현 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거쳐 문재인 정부 때 국정원 기조실장,1차장을 지냈다. 지금은 민주당 의원으로 국회 정보위 간사를 맡는 등 국정원과 북한 관련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한 고진화는 작년 10월 사망했다.
이들은 구속 이력 때문에 공직 진출이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시민운동을 하거나 학원 강사나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다. 윤영상(서울대)은 학원 강사를 거쳐 민노당,조국혁신당에서 활동했고 지금은 카이스트 교수다. 장영승(서울대)은 나눔기술을 창업했고 박원순 서울시장 때 서울경제진흥원 대표를 했다. 고려대 오태헌은 노동운동을 그만둔 뒤 프로그래머로 고려대장경 전산화 작업을 하다 1998년 출가해 지금은 광주 증심사 주지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6월 항쟁, 90년 전노협 결성을 보면서 이제 내가 더 할 일은 없다고 판단해 운동을 접었다”고 말했다. 외국계 회사 임원, 변호사, 의사 그리고 고향에서 고물상을 운영한 사람도 있다. 점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전학련, 삼민투 핵심 인물로 수배됐던 인사 중 서강대 이해식은 지금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이고, 연세대 정태근은 한나라당 의원을 지냈다. 전남대 오병윤은 통진당에서 국회의원을 했다.
◇이재명 정부 국무총리와 여당 대표
김민석 총리가 이재명 정부 첫 국무총리로 지명되자 다시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이 화제가 됐다. 김 총리는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전학련 의장으로 점거 현장에는 없었지만 사건 배후로 지목돼 수배·구속됐다. 김 총리는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은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것”이라며 “미국이 어떤 민주주의적 태도를 가졌는지 물은 일”이라고 말했다. 함운경 등 일부 관련자는 “김 총리는 사후 수습을 맡았을 뿐 사건에 직접 관여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에 민주당 당대표가 된 정청래 의원은 1985년 미국 문화원이 아닌 4년 뒤 1989년 주한 미국 대사가 생활하는 대사 관저 점거 사건으로 구속됐다. 85년 문화원 점거가 광주를 알리고 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이 명분이었다면 정 대표가 참여한 대사 관저 점거는 반미 운동 성격이 명확했다. 정 대표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현주건조물방화예비, 폭력행위처벌법, 총포·도검·화약류 단속법, 화염병처벌법 위반 등으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미국 공관 점거자들에게는 항상 미국 비자 발급이 문제 됐다. 김민석 총리가 비자를 받아 미국 유학을 한 것과 달리 정청래 대표는 2013년 국정감사를 위해 비자를 신청했을 때 거부당한 일도 있다. 민주당 신정훈 의원은 도의원 시절 여러 번 미국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했지만, 2005년 지역 혁신 사례를 연구하겠다는 명목으로 신청했을 때 미국은 그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 방문 이후 “문화원 점거 전력을 밝히지 않았다”며 비자를 다시 취소했고, 신 의원 측은 “미국이 묻지도 않았는데 뭘 숨기느냐”고 반발했다. 그러나 문화원 점거 전력이 있는데 미국으로 유학한 이도 적지 않다.
일본→미국→서울시로 주인 바뀐 국가문화재
1985년 대학생들이 점거했던 서울 을지로의 옛 미국문화원 건물은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건물은 1938년 미쓰이물산 경성 지점으로 들어섰다. 지하 1층, 지상 4층에 연면적 4400㎡ 규모다. 모더니즘 양식의 이 건물 완공 소식은 당시 신문에 실릴 만큼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광복 후 미국 정부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1990년까지 미국문화원 건물로 사용됐다. 1990년 서울시로 소유권이 넘어왔고, 2013년까지 서울시청 을지로 별관으로 사용됐다. 2006년에는 근대 건축물로서 가치와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 238호가 됐다. 국가유산청은 “창 사이의 벽에 주름 장식을 넣은 것은 장식을 배제한 1930년대 국제주의 양식에서 벗어나려 한 시도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2015~2019년까지 밀랍 인형을 전시한 그레뱅뮤지엄으로 활용됐다. 지금은 시설이 낡아 리모델링을 검토하고 있다. 롯데호텔 건너편인데 대부분 주목하지 않고 지나가는 실정이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에 따른 재건축 제약과 비용이 문제다. 서울시의회는 작년 1200억원을 들여 이 건물을 22층 규모 서울시의회 신청사로 건립하는 계획안을 서울시에 냈다. 그러나 문화재를 개조하려면 절차가 까다롭고 1200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야 해 논란이 됐다.
서울시는 현재 시청사가 주변 민간 빌딩 세 곳에 세들어 있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예산 낭비이기 때문에 이 건물을 리모델링해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문화재를 보호하면서 리모델링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