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하타 히로시씨는 택시를 타고 광화문에 왔다. 괴상한 머리띠를 두른 채 ‘동해물과 백두산에’를 흥얼거려서 택시 기사를 놀라게 했다. 일본 관광청 장관으로 한국에 왔던 2012년엔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단상에서 한국 애국가 1절을 열창해 대서특필됐다. 일본에 돌아가 항의받지 않았느냐고 묻자, “나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중국, 프랑스, 멕시코 등 25국 국가(國歌)를 부르기 때문에 괜찮다”며 헤벌쭉 웃었다.
5개의 눈이 달린 붉은색 머리띠의 정체는 오사카 엑스포 마스코트인 ‘먀쿠먀쿠(脈脈)’. 은퇴 후 고향인 교토와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을 위해 “온몸을 벗고” 뛰고 있다는 그는 엑스포를 알리기 위해 경주를 거쳐 서울로 왔다. 65세의 이 전직 장관은 엑스포를 위해서라면 펄펄 끓는 아스팔트에서 물구나무도 설 기세였다.
◇ ‘미스터 먀쿠먀쿠’로 불리는 남자
-더운데 머리띠는 왜 쓰고 다니나?
“사람들이 쳐다보라고! 하루 8시간, 잠잘 때 빼고는 항상 쓰고 다닌다.”
-야구장에서 시구도 했더라.
“인간이 된 먀쿠먀쿠의 첫 시구랄까? (시구 영상을 보여주며) 이게 나다! 타이베이 마라톤 대회에서도 먀쿠먀쿠를 쓰고 완주했다.”
-생김새가 기이하다.
“처음엔 낯설지만 볼수록 귀엽다. 요즘 일본에선 최고 인기다. 빨간 머리는 피, 파란 몸통은 물! 생명을 구하고 연결한다는 뜻에서 이름이 먀쿠먀쿠(脈脈)다.”
-지구 한편에선 연일 총성이 울리는데.
“2차 대전 종전 후 돌아온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며 울었다. 이번 엑스포는 우리가 다 같은 지구촌의 생명으로서 평화를 위해 손잡아야 한다는 걸 일깨운다.”
-폭염에도 엑스포 관람객이 1000만을 넘어섰다더라.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다. 생명과 미래가 주제인 만큼 최첨단 디지털 기술과 문화·의료·기후변화 등 놀라운 혁신의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한국에선 오사카 엑스포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10월까지 하니까 늦지 않았다. K팝 흘러넘치는 한국관을 비롯해 153국 파빌리온에서 매일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먀쿠먀쿠를 쓰고 각 나라 춤을 추고 있는 나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웃음).”
-7월 대지진설은 걱정 안해도 될까?
“일부 지역에 약한 지진이 있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나라면 루머 대신 과학에 기반한 일본 기상청의 일기예보를 믿겠다(웃음).”
◇ 25국 國歌 부르는 장관
-한국엔 우리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는 일본 장관으로 화제가 됐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열도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한국 정부와 지자체를 비롯해 배용준·최지우·동방신기 등 여러 스타들, 그리고 한국 국민께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응원과 지원을 해주셨다.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애국가를 불렀다.”
-불편해하는 일본 국민도 있었다던데.
“아주 조금(웃음). 그러나 나는 한국뿐 아니라 25국 국가를 부를 수 있다. 어떤 나라를 방문할 때 반드시 국가를 배워서 간다. 국가에는 그 나라 역사와 문화, 정서가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월드컵 때는 프랑스 국가를, 독일 월드컵 때는 독일 국가를 불렀다.”
-한국에만 102번 방문했더라.
“나는 한국이 정말 좋다. 오이타현청에 파견 나가 있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 열렸는데, ‘한국-스페인’전을 보다 한국 선수들의 매서운 투지와 열정에 반해버린 것이 그 시작이다.”
-그래서 오이타현에 프로축구팀을 만든 건가?
“스포츠광인 나는 오이타현에 축구팀을 만들어 J리그에 진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일본 축구 환경이 좋지 않아 한국 축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994년 ‘오이타 트리니타’ 팀을 만들고 문정식 감독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멋진 골을 넣은 황보관 선수를 영입했다.”
-대한축구협회도 찾아갔다던데.
“당시 일본에선 비판적 시선이 있었지만 바로 옆에 축구 강국이 있다면 당연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8년 우리가 나비스코컵에서 우승했을 때 해설자가 인상 깊은 말을 했다. ‘오이타 트리니타의 우승은 일본과 한국의 힘이 합해져 일군 것’이라고. 최근 (90년대 일본 축구 간판) 이하라 마사미 선수가 수원 삼성 코치로 합류했다는 소식에 감회가 새로웠다.”
-2002 한일 월드컵에도 관여했다고 들었다.
“월드컵 조직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한국에 자주 갔다. 월드컵 때는 서울시청 광장에서 한국 서포터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한국 팀을 응원했다. 진로 소주에 취해 잠든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다(웃음).”
-한국이 왜 좋은가?
“한국 ‘사람’의 의리와 따뜻한 정이 좋다. 생일과 설날이 되면 지금도 한국 친구들이 연락한다. 일본 사람이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류도 좋아하나?
“BTS의 ‘다이너마이트’를 들으며 코로나 시기를 견뎠다(웃음).”
◇ 공무원이 된 코미디언?
-전형적인 일본 관료 스타일은 아니다.
“교토대 수학과 교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 때부터 4년 동안 유럽에서 살았다. 그때 글로벌 감각을 익혀서 그런가, 나이·성별·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이와 사이좋게 지낸다. 자존심, 수치심 따위는 진작에 버렸다(웃음).”
-공무원이 아니라 코미디언이 될 걸 그랬다.
“그렇잖아도 내가 라틴계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웃음). 나로 인해 사람들이 웃을 때 가장 행복하지만, 공무원이 되어 일본을 더 멋진 나라로 만들고 싶었다.”
-도쿄대 법대면 최고 엘리트인데.
“수업은 안 듣고 친구들과 장래 일본을 어떻게 만들까 토론만 했다(웃음).”
-대학 시절 40종의 아르바이트를 뛰었다는 게 사실인가?
“부모님이 돈을 안 주셨다. 교토대 교수인 아버지는 아들이 도쿄대 가는 걸 반대하셨다. 도쿄대 법대에 합격한 뒤 바로 버려졌다(웃음). 그러나 아르바이트는 내게 어떤 직업도 존중받고 감사받아야 한다는 걸 일깨웠다.”
-법조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늦잠을 자서 사법시험장에 못 갔다, 하하! 그런데 공무원이 적성에 딱 맞았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윗사람 모시는 법, 아랫사람 다루는 법을 터득한 것이 관료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 배용준과 레이디 가가
-공직자로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동일본 대지진 때일까?
“물론이다. 후쿠시마 부흥에 내 인생을 걸었던 시기다. 배용준, 레이디 가가 등 그때 도와주셨던 분들께 죽을 때까지 감사하며 살 거다.”
-레이디 가가와 배용준을 직접 만났더라.
“레이디 가가 뉴욕타임스를 통해 우리를 응원해주셔서 일본으로 초청했다. 황홀하게도 내 볼에 진한 키스를 해주셨다(웃음). 배용준씨의 미소는 얼마나 환상적인가. 그래서 내가 물었다. 욘사마는 화장실에서도 이렇듯 멋지게 웃고 계시냐고(웃음).”
-장관 퇴임 후엔 왜 오사카로 갔나?
“침체된 간사이 지역 관광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태 달라고 하더라. 나는 불 속에서 밤 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기꺼이 달려갔다.”
-오사카 관광국에서 ‘24시간 잠들지 않는 오사카’, ‘오사카 온리 원’, ‘통합형 리조트(IR)’ 등 여러 기획을 했더라.
“열 살 때 오사카 엑스포(1970년)를 본 이후 오사카는 내게 늘 놀라운 도시였다. 그러나 퇴임 후 오사카에서 우연히 만난 한 택시 기사가 ‘오사카에는 매력이 없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1500년 대륙의 관문인 오사카를 현관으로 삼아 다른 지방 도시로도 관광이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매일매일 머리를 맞댄다.”
-지난해 도쿄를 누르고 외국인 관광객 신장률 1위를 기록했더라. 미조하타 히로시 효과일까?
“나는 ‘같이 가자!’고 외치는 프로듀서일 뿐이다(웃음). 관광 산업은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지난해 외국인 관광객 소비액(8.1조엔)이 반도체·전자 부품 수출액(6.1조엔)을 뛰어넘었다. 온몸을 벗고 내가 뛰는 이유다.”
◇ 오사카 숨은 맛집?
-최근 BTS 정국이 ‘도쿄를 더 위대하게’란 문구가 적힌 모자를 써서 사과한 일이 있었다.
“저의 글로벌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웃음).”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가 양국 관계를 늘 긴장시킨다.
“신중하게 풀어가되 미래 지향적으로 해결됐으면 좋겠다. 서로의 문화를 편견 없이 사랑하는 양국의 젊은 세대를 보더라도!”
-오사카 맛집을 소개하는 유튜버 ‘마부장’을 아시나?
“물론이다. 식사도 같이 했다.”
-마츠다 부장도 모르는 숨은 맛집이 있다면?
“기타하마 지역에 있는 ‘판 가라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빵집이다. 미슐랭 셰프인 가라토씨가 경영하는데 식물성 버터와 시럽으로 건강하고 맛있는 빵을 구워낸다. ‘오감(五感)’이란 뜻의 양과자집 ‘고칸’도 최고다. 쌀로 만든 롤케이크가 대표 제품이다. 도톤보리의 ‘크레오르’도 좋아한다. 다코야키와 오코노미야키를 퓨전으로 만들어내는 오래된 가게다.”
-‘세 살 아이처럼 살자’가 인생 신조라던데.
“타인의 좋은 점, 장점만 보고 살자는 뜻으로!”
-어린이·청소년들을 위한 기부도 많이 한다더라.
“돈은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것! 어차피 인생은 한 번이고 죽을 때 저세상에 가지고 갈 것은 3개밖에 없다. 친구, 기억,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충실한 마음!”
-앞으로의 꿈은?
“멋진 여성과 결혼(재혼)하는 것, 하하!”
오사카 엑스포 1000만 관객 돌파엔 이 남자의 지칠 줄 모르는 명랑함이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다시 먀쿠먀쿠를 뒤집어쓴 그는 20년 전 한일 월드컵 때 끌고 다녔다는 캐리어를 끌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바퀴가 닳아서 잘 굴러가지 않았다.
☞미조하타 히로시
1960년 일본 교토 출생.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1985년 일본 자치성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오이타현에 파견돼 일본 축구 J리그 ‘오이타 트리니타’ 구단을 창단하고, 리쓰메이칸 아시아태평양대학을 유치했다. 2002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실행위원을 지냈고, 2010~2012년 일본 관광청 장관을 역임했다. 퇴임 후 내각관방, 오사카부·교토부 특별고문을 하다 2015년부터 오사카부 관광국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