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왼쪽 다리를 이끌고 시위에 나온 87세 김숙희 전 장관은 “이화여대와 김활란 총장을 모독한 더러운 입에 침묵하는 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김지호 기자

87세 김숙희 전 교육부 장관이 지난주 이화여대에서 열린 ‘김준혁 규탄 대회’에 나선 건, 모교와 김활란 초대 총장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더불어민주당 수원정 김준혁 후보가 “김활란이 종군위안부를 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고, “이화여대생들을 미 장교에게 성상납시켰다”고 주장한 데 분노한 노(老)교수는, 뇌졸중으로 마비됐던 왼쪽 다리를 이끌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화여중·이화여고·이화여대를 나와 “내 이력서에서 이화를 빼면 아무것도 없다”는 김 전 장관은 김활란 박사에게 강의를 들은 마지막 세대다. “내가 참어른으로 존경하고 따른 김활란 박사에 대한 폄훼와 모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그는 “거짓 선동, 여성 비하를 밥 먹듯 하는 자들이 국회로 들어간다면 이 나라엔 미래가 없다”고 했다.

◇머리에 性만 가득한 역사학자

-몸이 불편해 보이신다.

“다리는 이 모양이지만 절뚝거리며 나갔다. 내 위 선배들은 거의 돌아가셨거나 누워 계시니 나라도 나가야지. 그런 소리를 듣고 어떻게 그냥 앉아 있나.”

-왜 그토록 화가 나셨나?

“내가 김활란 박사에게 배운 마지막 제자다. 4학년 때 ‘여성과 직업’이란 강의를 그분께 직접 들었다. 당시 김활란은 이대생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여성이 앙모하던 롤모델이었다. ‘나도 이다음에 김활란 박사처럼 될래’ 하며 자랐다. 그런 어른에게 듣도 보도 못한 역사학자가 국회의원 후보라고 나와서 더러운 소리를 했다기에 내가 나섰다.”

-한신대 교수로 역사학자인 김준혁 후보는 김활란 총장이 종군위안부를 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는 김활란 박사가 이화전문학교 교장이었다. 일본 놈들이 이화생들도 전쟁에 동원되도록 연설을 하라고 그분을 옛날 체육관 있던 건물의 큰 나무 아래로 강제로 끌고 내려갔다. 그러나 일본 놈들이 떠나자마자 기숙사로 쫓아 올라가셔서는 학생들에게 여기서 빨리 도망가라고, 고향 가서 결혼을 하든지 초등학교 교사라도 해서 강제 동원을 피하라고 하셨다.”

-김준혁은 김활란이 낙랑클럽을 통해 이화여대생들을 미 장교에게 성상납시켰다고도 했다.

“그 사람이 신학대 교수가 맞나? 어떻게 머리엔 든 거라곤 성(性), 섹스밖에 없나. 낙랑클럽 같은 건 나는 모른다. 다만 김활란 박사는 유엔이 6·25에 참전해 준 걸 무척 감사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유엔데이(10월 24일)’를 그냥 보내지 말고 정성껏 기념하라고 당부하셨던 기억이 난다.”

-김준혁은 이임하의 논문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을 근거로 성상납을 주장했다.

“전쟁으로 이화대학이 부산으로 피란 갔을 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너무 기뻤던 김활란 박사가 미군 장교들을 불러 식사 대접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미국인들에게 밥을 주려면 몇 마디라도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니 교수들과 영어과 상급반 학생들을 불렀을 것 아닌가. 낙랑클럽인가 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었을 것이다.”

-논문이 인용한 1953년 미국 CIC 보고서 원문에 ‘엔터테인(entertain)’ ‘호스티스(hostess)’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더라.

“영어도 모르는 것들이 흉측한 쪽으로 해석을 했겠지. 미국에서 엔터테인을 섹스와 연결해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컬럼비아대에서 학위를 받은 김활란 박사가 영어가 유창하니 이승만 대통령이 뭔 일이 생기면 의견을 구하고 이화대학에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두 분 다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그 과정에 어떻게 성상납이란 행위가 있었다는 건가. 그런 더러운 상상만 하는 이가 국회의원 후보라는 건 유권자에 대한 모독이다. 그 후보의 대학 선배란 사람이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다고 하더라.”

이화여대 총동창회 회원들이 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 앞에서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정 후보의 '이대생 성상납' 막말을 규탄하고 후보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천 쪼가리로 기워 입은 두루마기

-김활란 총장은 어떤 사람이었나.

“말씀 한마디를 해도 참 캐주얼했다. 권위를 가지고 덤비는 사람이 아니라 순박하고 겸손했다. 내가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 포스트닥터를 하다 이화여대 교수로 왔는데 당신 집으로 나를 잠깐 와보라고 하시더라. 과학 얘기 좀 해보라며. 그때만 해도 외국에서 사이언스(과학)를 공부하고 온 여성이 거의 없었다. 선생이 늘 입고 다니시던 두루마기도 잊을 수 없다. 안쪽을 보니 군데군데 천 쪼가리로 기웠더라. 검약하기도 하셨지만, 당신은 오래 입어 몸을 폭 감싸주는 옷이 좋다고 했다. 박마리아처럼 폴리티컬(정치적)한 분이 아니었다.”

-김활란은 한국YWCA 창립자이기도 하다.

“1922년에 베이징에서 만국기독학생회의가 열렸다. 그곳에 대한민국 대표로 김활란 박사가 가셨다. 일제강점기인데도 세계 청년들이 모여 만국 회의를 하는 곳에서 이분이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로 당당히 등록하고 인증을 받아 오셨다. 한국 YWCA가 일본보다도 규모가 크다. 2022년 4월이 100주년이었다.”

-여성운동의 기초를 그때 마련한 셈인가.

“한국YWCA를 세운 뒤 김활란 박사가 펼친 생활 운동이 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다들 외상(床)에 밥을 먹었다. 할아버지 밥상 따로, 아버지 밥상 따로 차리다 보니 여자가 부엌에서 헤어날 시간이 없는 거다. 그래서 김 박사가 다 같이 둘러앉아서 먹는 둥글레 밥상을 생활화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여성들을 부엌에서 끄집어내려고.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이분의 아이디어로 나왔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창립했다.

“김활란 생각에 우리나라 여성들이 이화대학만 쳐다보고 있어선 안 되니 일종의 풀뿌리 운동을 시작한 거다. 전국 곳곳에 크고 작은 여성 단체들이 생겨나도록 도왔고, 그들을 한 협의체로 연결한 게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다. 그뿐 아니다. 대학 나온 여성들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학사협회를 만드셨고, 대한주부클럽연합회도 결성했다. 여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분이다.”

-여협이 너무 보수적이라며 진보 성향 여성들이 만든 단체가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이다.

“김활란 박사는 ‘여성과 직업’을 강의하실 때 프로페셔널한 여성으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사도 잘 병행하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런 점이 보수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 역시 일과 가정의 균형, 건강한 가족을 만드는 것이 직업의 성공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후보가 유튜브에 나와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학생들을 성상납시켰다고 주장하는 모습. 이화여대는 김준혁 후보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유튜브 영상 캡처

◇김준혁은 사퇴로써 사과해야

-여연은 이화 출신 여성운동가들이 주축이 돼 결성됐는데, 김준혁 후보에겐 침묵하고 있다.

“처음엔 좋은 뜻으로 시작했는지 몰라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힘과 돈(지원금)이 많아지다 보니 제 역할을 잊은 것 같다. 청와대 가고 국회로 가면서 여성을 대표한다는 사명은 까맣게 잊고 자기 당에만 아부하는 사람들이 됐다.”

-민주당의 이대 출신 국회의원 후보들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당선 욕심에 이화 출신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138년 역사의 이화가 있어, 선배들의 피와 눈물이 있어 오늘의 자신이 있다는 생각은 요만큼도 안 할 것이다.”

-모교가 자랑스럽지 않은 걸까.

“일제강점기라는 험한 세상을 자기 방식으로 저항하며 살아낸 선배들이 이 나라를 일궜다. 툭하면 친일파 딱지를 붙이는데 개떡 같은 소리다. 물려받은 세상을 후배들이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나라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텐데, 그저 물어뜯고 깎아내리고만 있으니 개탄이 절로 나온다.”

-김준혁 후보가 사과했다. 그래도 사퇴해야 하나.

“입으로 나불대는 사과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사과를 행동으로 보여야지. 그런 사람을 공천한 사람도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지난 5일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김숙희 전 교육부 장관./김지호 기자

◇'여성 혐오’ 판치는 천박한 세상

-이화여중, 이화여고, 이화여대를 나오셨더라.

“내가 고향 천안에서 다닌 제일감리교회 유치원도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세웠다. 윤치호씨가 당시 천안 군수였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스크랜턴이 이화학당을 만든다고 하니 천안에도 유치원을 세워달라고 부탁했단다. 그 유치원 100주년 때 내가 끌려 내려가서 축사를 했다(웃음).”

-천안에서 살다 서울로 이사한 건가?

“세브란스를 나온 아버지가 천안에서 병원을 하셨는데 6남매가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다.”

-어머니도 이화여고를 나왔다던데.

“그러니 내 머리통 속이 온통 이화 아니겠나. 큰오빠가 사업을 하다 망쳐서 빚을 잔뜩 지고 있을 때 날 미국으로 유학 보낸 것도 어머니였다.”

-씩씩한 딸이었나 보다.

“오빠 셋을 타고 넘는다고 많이 맞았다.”

-남동생인 도올 김용옥 교수와는 잘 지내시나.

“꼴딱지 보기 싫어 안 만난 지 오래됐다.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해 내가 화가 났다. 나보다 열한 살 아래인 제가 뭘 안다고. 난 이승만 박사와 악수도 한 사람이다. 9·28 서울 수복 기념식 때 이화여고 대표로 가서 인천상륙작전에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꽃다발을 걸어드렸는데, 조그만 학생이 까치발로 꽃 걸어주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이승만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시더라. 손이 엄청 크고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 ‘건국전쟁’이 이 박사의 공을 바로세워줘 감사하다.”

-이화여대에선 호랑이 선생이었다던데.

“김옥길 총장 호출에 급히 귀국해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이화여대 C관 306호로 가서 첫 강의를 했다. 애들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욕부터 한 선생이다.”

-한국 여성교육의 산실인 이화가 왜 이렇게 공격받는다고 생각하나.

“여성 혐오, 그리고 머저리들의 열등감 때문이지. 참으로 천박하지 않은가.”

-역대 최악의 후보들이 난립한 총선이라고 한다.

“돈 밝히고, 입만 열면 거짓말하고, 죄 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들을 국회로 보낸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기로에 섰다.”

-격정의 말씀 그대로 써도 될까.

“물론이다. 이 늙은이한테 총 들고 올 사람은 없을 테니!”

☞김숙희

1937년 충남 천안 출생. 이화여중, 이화여고,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38년을 재직했다. 김영삼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한국YWCA 회장, 한국영양학회 회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화학자였던 김용준 고려대 교수,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와 남매지간이다. 현재 이화여대 명예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