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대한축구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황선홍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이 '손가락 하트'를 만들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는 "아시안게임 우승 후 나도 선수들과 함께 라커룸에서 춤을 추고 싶었다"고 했다.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아빠를 향해 “축구 그만해!” 하며 울던 아홉 살 딸이 ‘12월의 신부’가 된다. 붕대 투혼으로 2002 월드컵 4강을 일군 황선홍(55)은 “경기장보다 신부 아버지로 서야 할 결혼식장이 훨씬 떨린다”며 웃었다. 아빠는 딸과 한 약속을 어기고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K리그 감독으로 부침을 겪었으나, 아시안게임 금메달 쾌거로 명장(名將) 반열에 올랐다. 이제 파리 올림픽. 훤칠한 키에 블랙 슈트를 입은 황선홍 감독이 대한축구협회 사무실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아시안게임 최대 고비는?

-요아힘 뢰브(전 독일 감독)가 들어오는 줄 알았다.

“아이코, 그럴 리가(웃음).”

-아시안게임 끝나자마자 치른 파리 원정 평가전에서 티에리 앙리가 이끄는 프랑스 대표팀을 3대0으로 제압했더라.

“이기는 것보다, 훌륭한 선수들과 경쟁해 우리에게 뭐가 부족하고 뭘 더 발전시켜야 하는지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한 매치였다. 3대0으로 졌더라도 얻는 게 많았을 것이다.”

-파리로 출국하던 날 목발을 짚고 공항에 나타났던데.

“선수 시절 오른쪽 무릎을 세 번 수술했다. 그게 고질병으로 남아서 재발한다. 이번에 미뤄둔 수술을 했고 잘 회복되고 있다.”

-온 국민을 행복하게 해준 지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감독이 꼽는 명장면은 뭘까?

“아무래도 일본과 벌인 결승전에서 조영욱이 꽂아 넣은 결승골! 우리가 우승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 득점이었다.”

-전반 1분 30초 만에 먼저 실점했을 땐 당황했겠다.

“대회를 준비할 때 먼저 실점을 당하는 경우, 상대의 압박 수비로 공격이 막힐 경우에 대비해 여러 전략을 짠다. 너무 빨리 실점했지만 심리적으로 쫓기지 않고 바뀐 전술을 차분히 실행하면 만회할 수 있다고 믿었다. 흔들리지 말라고 주문했고 10분, 15분 지나면서 다시 우리 페이스로 경기를 가져왔다. 백승호 등 와일드카드 선수들이 중심을 잡아줬다.”

-가장 힘든 고비는 우즈베키스탄과 치른 4강전이었다고 했더라.

“압박이 거셌고, 아무래도 긴 볼을 사용하다 보니 불확실한 패스가 많았다. 다행히 정우영 선수가 중요한 득점을 해줘 안정감을 찾았다. 너무 거친 플레이로 우즈벡 스스로 자멸한 것도 있다. 1명이 퇴장당하지 않고 일대일로 계속 갔다면 굉장히 어려운 경기가 됐을 거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8강에서 우즈벡과 연장전까지 갔던 악몽이 떠올랐다.”

-바레인전에 합류한 이강인 선수는 전반 35분 만에 교체했다.

“강인이는 좀 더 뛰겠다고 했지만 내가 안 된다고 했다. 이강인 선수가 부상당하고 한 달 이상 풀(full) 경기를 소화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강인이 활약할 때는 준결승·결승이라고 봤고, 컨디션 사이클도 그렇게 맞췄다. 첫 출전에서 30분, 다음 경기는 60분 이런 식으로. 바레인전부터 90분씩 뛰게 했다면 부상 같은 문제가 틀림없이 발생했을 것이다. 감독은 더 큰 그림을 보고 있어야 한다.”

-키르기스스탄전에서 5골을 몰아칠 때도 선수들에게 침착하라는 제스처를 보내더라. 원래 냉정한가.

“프로팀을 10년 이상 맡으면서 흥분도 하고 심판에게 격하게 항의도 해봤지만 흥분해서 결과가 좋았던 기억이 거의 없다. 그래서 냉정해지려고, 긴박한 상황일수록 극도로 차가워지려고 노력한다.”

-골을 넣었을 때도?

“우리의 목적은 우승이기 때문에 한 골, 한 경기에 기뻐할 수 없다. 마지막에 웃어야 한다.”

2023년 10월 7일 중국 항저우 황룽스포츠센터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결승전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한국대표팀이 일본에 2-1 승리하며 금메달을 차지했다. 시상식을 마치고 우승 축하 헹가래를 받고 있는 황선홍 감독. /송정헌 스포츠조선 기자

◇랩 하는 이순민, DJ 뺨치는 정우영

-정작 아시안게임을 100여 일 앞두고 마음고생을 했더라. 중국 원정 경기에 카타르전 3연패까지 말이 많았다.

“중국의 거친 플레이로 선수들이 부상을 당한 건 마음이 아프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본경기에 대비해 현지를 경험하고 적응하는 데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팬들의 질타는 전혀 섭섭하지 않다. 본게임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만 했다.”

-경기 도중 수첩엔 뭘 그렇게 적으시나.

“하프타임에 지시할 것들. 생각이 막 지나가니 그때그때 적어두지 않으면 지시할 때 두서가 없어진다.”

-16강부터는 돌발 상황에 대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해 놓는다던데.

“모든 감독님이 마찬가지겠지만 90분 경기를 15분, 30분, 45분 단위로 조각을 내 전략을 짠다. 상대가 전술적 변화를 줄 것까지 대비해 시뮬레이션을 한다. 근데 16강부터는 90분 만에 경기가 끝나지 않고 연장전, 승부차기까지 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더 치밀해야 한다. 승부차기 순번까지 고려해 선수 교체를 할 정도로.”

-퇴장, 부상 같은 최악의 경우도 대비하나.

“물론이다. 가능한 한 많은 변수를 전제하고 전략을 짠다. 다행히 아시안게임에선 최악의 상황이 없었다.”

-프로팀과 국가대표팀 운용이 많이 다른가.

“1년 내내 선수들과 소통할 수 있는 프로팀과 달리 대표팀은 단기간에 팀을 조합하고 완성해야 하는 임무가 어려우면서도 흥미롭다. 선수 개인의 능력과 성향에 맞게 퍼즐 조각을 맞춘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나이가 2배 이상 차이 나는 MZ세대 선수들과는 어떻게 소통하나.

“K리그 시상식에 갔더니 이순민 선수가 무대에서 랩을 하더라. 정우영은 음악을 다루는 수준이 거의 DJ급이다. 송민규는 이동하는 버스에 협회 임원이 앉아 있어도 혼자 노래를 부른다. 라커는 거의 클럽 수준이다(웃음). 그래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팀 생활과 규율, 경기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개인적 취향은 최대한 존중하려 한다. 절제 속에 자유가 있다.”

◇태극 마크를 단다는 것

-10회 연속 진출을 노리는 올림픽 예선 조에 일본, 중국, UAE가 들어왔더라.

“죽음의 조다(웃음). 그런데 우리 대표팀 구호에 ‘당당함’이 있다. 어떤 상대를 만나든 우리가 최고란 믿음을 가지고 어깨 딱 펴고 싸우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이강인 선수도 합류할까?

“유럽파 선수들은 리그 중이라 예선 참가는 어려울 것이다. 본선은 7월이라 가능할 수도 있지만, 아직 확정된 건 없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이미 병역 혜택을 받은 선수들은 안 나오려고 하지 않을까?

“나는 스무 살 때부터 국가 대표로 뛰었다.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단다는 것은 5000만 국민을 대표하는 일이다. 물질적 혜택, 병역 혜택 같은 것에만 결부해 생각하기엔 그 무게가 너무 크다는 뜻이다. 우리가 꾸릴 수 있는 최상의 전력을 꾸려서 국가 대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것이다.”

-2021년 ‘U-23(23세 이하)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됐을 때 우려와 기대가 엇갈렸다.

“지도자의 꿈을 꾼 건 월드컵 4강의 기쁨을 국민께 안겨드렸을 때다. 감독이 되어 월드컵에서 또 한번 4강의 기쁨을 선사해드리고 싶었다. 감독으로서 자질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감,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돌파해 나갈 자신감은 항상 있다(웃음). 이회택, 차범근, 히딩크 감독에게서 보고 배운 장점만 뽑아 쓰려고 노력하는데 여전히 부족하다.”

2002년 6월 4일 부산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2002한일월드컵 D조예선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선제골을 터뜨린 대한민국 황선홍이 벤치로 달려가고 있다. 왼쪽으로 유상철과 이을용이 따라가고 있다./Action Images / Tony O'Brien/로이터

◇더 편하고 쉬운 길은 없다

-시계를 돌릴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어떤 경기를 뛰고 싶은가.

“프로팀으로서는 1991년 6월 독일 레버쿠젠, 국가대표로는 1994년 6월 23일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레버쿠젠은 왜?

“그때 부상 당하지 않고 유럽 리그에서 오래 뛰었다면 더 좋은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손흥민처럼?

“흥민이는 넘사벽이다(웃음). 속도나 파워풀한 슈팅력 모든 면에서. EPL에서 득점왕을 한다는 건 공격수로서는 꿈에 가까운 일이다.”

-1994 월드컵 볼리비아전을 다시 뛰고 싶은 건 ’똥볼(뜬 볼) 스트라이커’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서일까?

“다시 뛸 수만 있다면 그렇게는 안 할 것 같다(웃음). 내가 도저히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온몸이 경직돼 있었다.”

-그래서 J리그로 도망치듯 떠난 건가.

“하도 많이 욕을 먹어서 대인 기피증이 생겼다. 차면 뜰까 봐 슈팅하기가 두렵더라. 98 프랑스월드컵에서 만회하고 싶었는데 출국 직전 무릎 부상으로 좌절됐다. 알아보는 사람 없는 곳에서 내 진짜 실력을 발휘해 보고 싶었다.”

-일본 리그에서 득점왕이 됐고, 34세에 다시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했다.

“당시 축구계에선 2002 월드컵 때도 황선홍을 찾는다면 한국 축구의 큰 문제라고 우려했다(웃음). 그만큼 공격수가 없다는 뜻이니까. 나이도 많아 기대도 안 했는데 히딩크 감독이 마지막에 불러주셨다.”

-볼리비아의 악몽이 약이 됐을까.

“물론이다. 이젠 어떤 욕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웃음).”

-폴란드전에서 넣은 2002 월드컵 첫 골이 인생골인가?

“사실 1994 월드컵 독일전에서 멋진 골을 넣었는데, 볼리비아전으로 16강이 멀어진 뒤라 축하받지는 못했다(웃음).”

-골을 넣고 왜 박항서 코치에게 달려갔나.

“첫 골이라 선수들을 엄마처럼 돌봐주는 박샘과 벤치에서 뛰지 못하는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히딩크 감독은 미처 생각을 못 했다(웃음).”

-첫 골을 넣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를 생각했다던데.

“삼남매를 홀로 키우신 아버님이 1996년에 돌아가셨다. 볼리비아전으로 혹평받는 아들만 보다 돌아가셔서 하늘에서라도 이 골 장면을 보시길 바랐다.”

-’황새’란 별명에 궁핍한 사연이 있다는 기사를 봤다.

“가난해 밥을 못 먹어 그랬다는 건데 와전된 거고(웃음), 워낙 마른 데다 다리가 길어서 달릴 때 껑충껑충 뛰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황새가 됐다.”

-웃음보다 눈물이 많았던 축구 인생이었을까.

“굴곡이 있어야 인생이 재미있지 않은가. 당연한 승리는 없다.”

-공격수는 스포트라이트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다. 다시 선수가 돼도 스트라이커를 택할까?

“물론이다. 공격수는 승패를 결정짓는 사람이니까. 비난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후배 공격수들에겐 어떻게 조언하나.

“모든 볼에 정성을 들이라고 한다. 정성을 들여야 볼이 골대를 맞고도 안으로 들어간다. 운도 노력을 어마어마하게 해야 따라온다.”

-젊은이들에게도 한 말씀 해달라.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편하고 쉬운 길은 없다. 정면 돌파가 가장 빠른 길이다.”

황선홍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이 12월 6일 서울 종로구 대한축구회관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더 편하고 쉬운 길은 없다. 정면 돌파가 가장 빠른 길이다"고 했다. /남강호 기자

☞황선홍

1968년 충남 예산 출생. 건국대를 나와 포항 스틸러스, 독일 레버쿠젠, 일본 세레소 오사카 등에서 선수로 뛰었다. 20세였던 1988년부터 2002년까지 국가 대표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103경기 50골)했고, 월드컵 4회 연속 출전 기록을 세웠다. 2003년 은퇴해 부산 아이파크, FC 서울 등 K리그 감독으로 활약하다 2021년 U-23 축구 국가 대표 감독에 선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