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기술이 일본의 경제 성장을 돕다

일본은 문화뿐 아니라 경제의 초석이 되는 기술의 뿌리도 조선이었다. 일본 경제는 16와 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것이 수출 대국의 초석이 되었다. 이 초석의 밑바탕에는 우리 조선의 앞선 기술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은 제련술과 자기 기술은 조선에서 전래된 것이었다.

더불어 이때부터 교역에 눈을 뜬 일본은 동남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 등으로 넓혀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난학은 의술로부터 시작되었다

의술로부터 시작된 난학, 네덜란드 의사와 일본 의학자의 토론 장면.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일 화친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213년 동안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 붐이 일어났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일본에서 환대받는 네덜란드 무역업자들. /위키피디아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레 일본 청년들과 사귀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난학은 이렇게 화란어를 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오란다 통사(阿蘭陀 通詞)’라는 직업 통역관 겸 상무관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무역관을 출입하면서 네덜란드 의사를 통해 서구의학을 접하며 그 지식과 기술을 익혔다. 이 시기에 서양의학 서적이 충격을 주었다. 기존 의학이 치료할 수 없었던 것을 네덜란드 의학이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난학은 이렇게 데지마에 파견되어 있었던 네덜란드 의사의 의술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시간이 갈수록 서구 문물 전체를 포함했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키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틀렸는지 알 수 있었다.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키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 5권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동경대의 전신이 바로 이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탈아론’이 주창되다

그 뒤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천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뒤 명칭도 ‘난학→양학→서학’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풍설서’를 통해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일본 최고액권 1만엔 지폐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 /위키피디아

19세기 메이지 시대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장래는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대학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의 전신인 지지신보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돼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렇듯 ‘탈아론’은 훗날의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재평가되는 16~18세기 아시아 경제

15세기 명나라의 해금정책과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동서양의 경제 위상을 바꾸었다는 것이 그간 세계 경제사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당시 아시아 경제에 대한 재평가는 이런 주장을 불식시키고 있다.

15세기 전후 명나라 해금정책은 왜구와 중국 남쪽 토호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그런데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말레이시아 반도의 말라카 해협을 점령하고 동남아 상업 패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포르투갈 함대는 중국 해안에 출현했다. 1517년 포르투갈은 중국에 함대와 특사를 보내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무역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법규를 지키지 않고, 무력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중국 관원들을 매수하여 1535년 마카오가 개방되었다. 명나라 정부는 마카오라는 작은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제한하면서 무역행위도 통제했다.

포르투갈 이후에 출현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의 상인들도 포르투갈 상인의 행동 방식을 반복했다. 심지어 스페인 사람들은 필리핀을 점령한 후, 수만 명의 현지 중국인을 살해했다. 이런 야만적 행동으로 중국 정부는 외국인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무역을 금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하여 해적 활동이 날로 극성을 부렸다. 이후 명나라 정부가 해적을 소탕한 후 무역 금지를 풀어주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서양인들이 도착한 신대륙 등은 대부분 군사 점령과 현지인들의 노예화가 뒤따랐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큰돈을 벌어갔다. 오로지 서양의 야만을 막아낸 곳은 무역을 거절한 중국뿐이었다. 서양인들이 돈을 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인들이 서양으로부터 큰돈을 벌었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무역역조로 인해 유럽에서 아시아로 유입된 금, 은은 엄청났다. 그 가운데 중국이 얻은 은은 유럽과 서아시아, 인도로부터 들어온 막대한 양에다가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8000~9000톤, 멕시코와의 교역에 의한 1천 톤을 합쳐 약 6만8000톤에 달했다. 유럽이 아메리카에서 얻은 은의 절반 이상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500년에서 1750년 사이 중국 인구는 1억2500만명에서 2억5000만명으로 두 배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 인구가 230만명에서 370만명으로 증가한 것보다 증가율이 더 높았다. 이는 대량의 은이 들어와 중국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경작지가 증가하고 2모작 도입으로 식량 증산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국경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17세기에 잠시 침체했으나 17세기 말에 다시 회복되었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면직물, 견직물 산업이 크게 번창했고 자기, 담배, 인디고 염료, 종이 산업 등도 발전했다.

이에 따라 점차 상업화되고 도시화도 가속화되었다. 당시 아시아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18세기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중국과 이집트, 인도는 세계의 어떤 나라들보다 부유하다. 특히 중국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훨씬 부유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사실 18세기 인도는 영국보다 생활 수준이 높았고, 중국은 농업생산성, 산업 및 시장의 다양성, 소비수준에서 세계 최고였다. 유럽이 동양을 앞서기 시작한 것은 유럽인들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이후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쇠퇴한 반면 유럽 국가들이 산업혁명으로 힘이 급격히 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는 1757년의 플라시 전투로 벵골 지방을 빼앗긴 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중국도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무장해제를 당해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까 19세기에 와서야 아시아가 뒤처졌다는 이야기이다. (참고: 프레시안,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등)

◇일본의 경제발전으로 에도가 18세기 최대 도시의 하나가 되다

상업이 번창하고 도시가 번영하는 17세기 에도의 분위기. /위키피디아

일본은 경제발전으로 인구가 1500년 1600만명에서 1750년 3200만명으로 급증했다. 경제가 급속히 상업화하고 도시화하며 18세기에 벌써 도시인구 비율은 오히려 중국이나 유럽보다 높았다. 1800년 무렵 인구 10만명 이상 도시는 45개뿐이었다. 그 가운데 유럽 도시는 절반도 안 되었으나, 당시 아시아 지역은 전 세계 도시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에도(지금의 도쿄)가 인구 140만명으로 18세기 최대 도시의 하나였다. 그 규모는 전성기의 로마와 비잔티움을 능가했다. 19세기 오사카와 교토 인구도 40~50만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