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 히라타에 1609년부터 무역관(상관)을 개설했다. 그 뒤 일본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기독교 선교 문제로 쫓겨난 이후 1855년까지 두 나라 간의 독점적 무역 관계가 지속되었다. 네덜란드가 이 기간 218년 동안 일본의 유럽을 향한 유일한 창구였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이 일본 경제부흥의 토대가 되다

원래 일본은 1543년 포르투갈 선박이 표류해 온 것을 계기로 처음으로 서구와 교역을 시작했다. 이때 포르투갈의 조총이 일본에 전래되었다. ‘나는 새도 능히 맞힐 수 있다’는 뜻에서 ‘鳥銃'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일본은 이 총으로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선으로부터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 제조술과 인쇄술, 신유학에서 의학까지 조선의 지식을 사람 채로 노획해 갔다. 당시 도자기를 굽는 가마의 온도를 1300도 이상 높이는 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다.

임진왜란(1592~1598년) 7년 동안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숫자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게 없다. 왜놈들이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끌고 간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도공들을 많이 잡아갔다. 일본 학자들은 7년 전란 중 끌려간 조선인이 적게는 2만, 많게는 5만 정도로 추정하지만, 한국 학자들은 6만 또는 10만으로 본다.

피랍된 조선의 도공들은 토기 등을 구워내다가 20년 만에 도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고령토를 이삼평이 1616년 사가현 아리타에서 찾아냈다. 이후 아리타 도자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으로 2000만점 이상이 수출되어 일본에 큰 부를 안기게 된다.

그리고 퇴계의 빼어난 문하인 강항(姜沆)도 임란 때 피랍되어 일본인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근세 초기 일본 유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임진왜란은 장기간의 난세로 부진했던 일본의 경제부흥과 학문 발전에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유대인 덕분에 살아남은 일본의 네덜란드 무역관

이즈음 일본에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했다. 기독교인이 늘어났다. 막부는 신자가 70만 명에 이르자 위협을 느껴 1612년에 전교 금지령을 내리고 교회를 파괴했다. 이어 선교사나 신자들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학살했다. 또한 무역항을 축소하는 등 무역 활동을 통제하고 1639년에 쇄국령을 내려 포르투갈 사람들을 추방하고 스페인과는 단교까지 했다.

그렇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유대인들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전파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유대교는 다른 민족에게는 전교하지 않는 종교였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무역관만 그대로 남겨 두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드디어 중국의 문턱을 넘다

그 무렵 중국은 해금 정책으로 오랑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중국을 네덜란드인들이 뚫었다. 1656년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순치황제에게 삼배구고(三拜九叩)의 수치를 마다하지 않고 무역의 길을 튼 것이다. 삼배구고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또 이것을 3번 되풀이하는 것이다. 청나라는 이것을 외국 사절에게도 강요했다. 어렵게 튼 중국과의 거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중국 거래는 일본의 은과 연계되어 ‘대박’을 치게 된다.

이어 1663년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향료와 노예무역 항구들을 연달아 건설했다. 당시 전성기의 네덜란드는 1만 6천 척에 달하는 상선을 보유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4개국 상선의 4분의 3 수준이었다.

◇일본, 은 수출로 경제 부흥하다

나가사키 데지마의 동인도회사 무역관, 가운데 네모난 인공섬이 데지마. /위키피디아

히라타에 있던 네덜란드 무역관은 1641년 나가사키 데지마로 옮겨져 독점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보며 거의 200년 동안 존속했다.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가장 중요한 은(銀) 수출국이었다. 은을 얻기 위해 1641년부터 약 200년간 나가사키에 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은 606척에 달했다. 당시 일본의 은 제련 기술도 조선에서 유출된 것이었다. 그 무렵 일본 은은 유럽에 비해 아주 쌌을 뿐 아니라 중국에 비해서도 많이 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일본에 파는 물건은 중국의 생사, 비단, 양모, 면 등의 직물류와 유럽의 피혁류, 염류, 설탕, 약품, 잡화 등이었다. 사들이는 물품은 은과 구리를 비롯하여 장뇌, 잡화, 지금(地金)과 화폐, 도자기, 칠기, 병풍 등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 은이 주종을 이루었다. 당시 은은 상품이자 통화였다. 대량의 은 수출로 일본 경제가 부흥의 토대를 쌓았다.

◇유대인, 상품교역보다 환차익거래로 큰돈 벌어

17세기 유대인들이 주도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된 수익원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향료와 비단이 아니라 금과 은 등 귀금속 화폐의 거래였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60~1720년 사이에 아시아에 판 상품의 87%가 은이었고 나머지만이 유럽산 상품이었다. 당시 금과 은의 국제간 시세 차익을 이용한 차익거래(Arbitrage)를 통해 돈을 번 것이다. 벌써 무위험 차익거래에 눈뜬 것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당시 서양과 동양의 ‘금은 교환 비율’은 너무 차이가 컸다.

서양은 수메르 문명 이래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대략 1대12.5 내외였다. 원래 이것은 수메르 천문학에 기초한 양력과 음력의 비율이었다. 금이 태양이요 은이 달이었다. 태양이 한번 변할 때 달이 ‘12번 반’ 변한다는 이유에서 1대12.5였다. 곧 태양력 1년이 음력으로 12개월 반이라는 것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로마제국에서도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2.5대 1이거나 13대 1이었다.

17세기 초 유럽의 금은 교환 비율도 크게 변하지 않아 바로 1대12 내외였다. 이에 비해 중국은 1대6 정도였다. 딱 두 배 차이였다. 중국에서는 은이 금에 비해 유럽보다 거의 두 배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싼 은을 구입하여 중국에 가져가면 그것만으로 100% 환차익을 누릴 수 있었다. 유대인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먼저 중국과 교역을 했던 포르투갈이 1600년부터 1630년까지 환차익 재미를 흠뻑 보았다. 이후 포르투갈을 대체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그 뒤를 이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 교환 비율은 점차 거리가 좁혀졌다. 그래도 중국은 1대10, 유럽은 1대15 내외였다.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의 차익 마진이 100%에서 50%로 줄어들었다. 이후에도 오랜 기간 유대인들은 이 환차익을 즐길 수 있었다.

중국에서 사용되던 정은. /위키피디아

그 무렵 일본에서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은이 풍부해지자 금에 비해 저평가 되었다.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은 일본에서 은과 구리를 구입하여 은의 가치가 높은 중국에 팔았다. 중국이 그토록 은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우선 중국 화폐제도의 변화 때문이었다. 중국은 다른 어느 문명권에서보다 일찍 지폐를 발행했다. 그런데 명대에 들어와서 지폐를 초과 발행하자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결국 지폐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를 대신하는 지불수단으로서 은이 유통되었다.

특히 은의 대규모 유통을 초래한 중요한 요인은 1560년대에 시행된 일조편법(一條鞭法)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가 모든 조세 수입을 은으로 통일한 것이다. 이 법이 시행됨으로써 이제 은은 공식 화폐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중국은 모든 조세를 은으로 통일하여 받을 때였다. 따라서 세금을 내야 하는 국민들이 대량의 은을 필요로 했다. 수요가 공급을 웃돌자 당연히 은값은 상승했다. 그래서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은 일본의 은과 구리를 중국에 팔고 중국에서는 은에 비해 저평가된 금을 구매했다. 이렇게 각국 간의 ‘금은 교환 비율’의 차이 곧 환시세 차이를 이용한 귀금속거래가 상품거래보다 훨씬 많았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은수저로 식사를 하는 등 은을 좋아하여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무역 이래 유럽의 은이 계속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당시 중국은 부유한 문명국으로서 유럽에서 들여오고 싶은 물품이 특별히 없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비단 등 중국 상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은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대로부터 중국과 유럽의 교역은 일방적인 유럽의 무역적자로 진행되어왔다. 게다가 16세기 중국의 일조편법 시행과 동서양의 금은 교환 비율 차이로 전 세계의 은이 이후 4세기간 계속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1500~1800년 사이에만 중국이 무역을 통해 얻은 은은 약 6만8000톤에 달했다. 유럽이 아메리카에서 얻은 은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오랫동안 은이 중심 화폐 구실을 해왔기 때문에 ‘은행(銀行)’이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것이다. 본디 ‘항(行)’은 점포를 가리키는 글자이므로 은행은 은을 취급하는 점포라는 뜻이다. 만일 중국이 금을 중심 화폐로 썼다면 ‘은행’ 대신 ‘금행’이라는 말이 쓰였을 것이다.

◇유대인, 돈을 상품으로 본 최초의 민족

유대인들은 고대 이래로 돈을 단순한 교환 수단이 아닌 ‘상품’으로 본 최초의 민족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농업에서 퇴출당하자 먹고 살기 위하여 대부업을 시작했다. 그 뒤 유대인들은 단지 돈이라는 자원을 이곳에서 다른 곳, 혹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줌으로써 사회 전체의 경제적 부를 더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대로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는 유대인 공동체인 디아스포라 덕분에 유대인들은 여러 나라의 환시세는 물론, 이러한 자산 가격의 시세 산정과 그 차익의 활용에 특출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메카니즘 자체를 이해도 못 할 때였다.

유대인들은 금융업이란 것이 돈을 낮은 수익률에서 더 높은 수익률의 투자처로 옮겨다 주어 사회 전체적으로 부를 더 늘리도록 해주는 ‘정보사업’이란 것도 일찍부터 알았다. 유대인들은 고대 이래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유대 커뮤니티 간의 정보 교환으로 특히 금융정보에 밝았다. 곧 지역 간 환시세 차이 등의 비대칭정보를 활용해 큰돈을 벌었다. 돈으로 돈을 버는 금융업을 가장 잘 꿰뚫어 보고 이를 활용한 존재가 유대인이다.

◇유대인, 중국-일본 간 중계무역으로 큰돈 벌다

당시 유럽은 신대륙 멕시코와 페루에서 생산된 은으로 주조된 은화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동양 무역을 확대하려면 그 은화만으로는 불충분했다. 게다가 은은 유럽에서 잘 생산되지 않는 귀중품이어서 중상주의 나라들은 원칙적으로 은의 반출을 금지했다. 이렇게 중상주의 시대에 다른 나라들은 모두 귀금속의 유출을 막았지만, 독특하게도 네덜란드 의회가 귀금속의 자유로운 수출입을 허가했다. 유대인들이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이 시기에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서의 대금 지불에 필요한 경화를 암스테르담에서 구입함으로써 영국 의회의 경화 수출금지령을 피해 나갔다.

16세기에 중국과 일본은 서로 거래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먼저 일본과의 교역을 엄격히 제한했다.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중국 남쪽의 해상 세력이 남방 세력이나 왜구하고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은의 교환가치가 일본보다 중국에서 갑절 가까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무역이 성행했고, 이 밀무역을 주도한 집단이 왜구였다. 왜구의 본업은 해적이라기보다는 무장 밀수단이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마카오와 일본 사이를 운항하며 이 무역의 상당 부분을 도맡았다. 1630년대까지 계속된 이 무역선은 가장 수익성이 높았다.

1600년대 들어 일본에 모습을 나타낸 네덜란드인들이 포르투갈인의 역할을 넘겨받게 된다. 그 무렵 명나라에서는 여전히 은에 비해 금이 쌌다. 때마침 일본은 은이 대량으로 채굴되어 당시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에서 은과 구리를 대량으로 사서 이를 중국에서 금과 바꾸었다. 또 중국에서 바꾼 금을 일본에 가져다 은과 바꾸었다. 이러한 무위험 차익거래로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유대인, 은을 매개로 삼각무역에 주력하다

또 유대인들은 삼각무역에도 은을 매개로 이용했다. 일본에서 산 대량의 은과 구리로 중국에서 비단과 금을 샀다. 비단을 다시 일본에 팔고 금과 구리는 인도에 팔아 후추와 무명을 샀다. 인도는 당시 구리가 비쌌다. 인도에서 산 후추와 무명은 유럽에 팔았다. 되돌아가는 길에도 역순으로 진행되었다. 인도에 들러 산 후추와 무명을 일본에 팔아 은을 구입했다. 그 무렵 동인도회사는 이런 식으로 상품 수출입으로 이득을 본 것보다 이러한 귀금속 환시세를 이용한 환차익 수익이 훨씬 더 많았다. 지역적으로도 유럽 대륙과 신대륙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동양에서의 수익이 훨씬 많았다. 고대로부터 환시세의 산정과 환차익거래는 유대인들의 장기였다.

이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일본의 해금(海禁)정책 덕분이었다. 중국과 일본 양국 간에 공식적으로는 서로 왕래가 없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부터 왜구의 창궐로 일본과의 교역을 엄격히 금했다. 한때 명나라는 민간무역을 인정해 해금정책을 완화하는 듯 보였으나 1644년 청나라가 들어서며 또다시 바다를 막았다. 청나라로 왕조가 바뀐 뒤에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꾸준히 늘어나자 결국 쇄국정책을 쓰기는 명나라 때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도 1640년경부터 해금 정책이 강화되어 막부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은 이 틈에 양국의 해금정책으로 제약받는 중일 간 무역을 중계하면서 말 그대로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번영기와 일본의 은 수출 전성기가 일치한다. 이때 일본도 막대한 은 수출로 거대한 국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커지는 첫걸음이었다. 일본은 은을 팔아 서양 상품을 수입했고 특히 서적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난학(蘭學)’이란 네덜란드 학문을 뜻하나 실제로는 서양학문 전체를 의미한다. 이후 매년 20만㎏에 달하는 대량의 은이 유출되자 마침내 일본의 은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에도막부는 무역에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았는데 마침내 1685년에 은 3000관으로 네덜란드와의 무역 금액을 제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