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설립 과정, ‘뭉쳐야 산다.’
사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의 설립이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대서양 진출이 늦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서양 해상권 장악 때문이었다.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이 격파한 이후인 16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네덜란드 상선들이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간의 대서양 해운과 무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20년이 채 되지 않아 네덜란드 상선들은 대서양 무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북부 저지대 홀란트와 질란트 주의 5개 항구도시 상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금과 상아 그리고 북미에서 모피 수입을 위해 작은 무역 회사들을 설립해 운영했다. 또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들여오던 소금 수입이 막히자 개인 선주들은 소금과 염료를 찾아 남미 해안과 카리브해 섬으로 배를 보내 이를 수입했다.
이렇게 대서양 무역이 확장됨에 따라, 해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소규모 무역 회사와 개인 선주들은 대서양 항해 중에 만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선단의 적대적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어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다. 게다가 상인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이윤이 점점 박해졌다. 홀란트 주 정부는 상인들의 공멸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 때처럼 경쟁 대신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곧 여러 무역 회사와 개인 선주들을 모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하나로 통폐합하려는 시도였다. 처음에는 홀란트와 질란트 주 간의 경쟁과 갈등으로 서인도회사 설립 계획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12년 휴전(1609~1621년) 동안 새로운 계획이 세워졌고 오랜 논의와 시행착오 끝에 5개 항구도시의 상인연합(Chamber)들이 이사회를 이끄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대주주가 많은 암스테르담 상인연합의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 장치였다. 마침내 1621년 6월 3일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서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갖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 WIC)가 구성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세계를 분할하여 서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 소유와 지배, 조약협상, 전쟁 수행에 최고권을 행사하는 국가적 권한의 기업이 되었다. 한마디로 무역과 식민지 개척 활동 곧 무역과 무력 침략을 동시에 수행하는 특권회사였다. 26척의 배와 3300명의 선원으로 출범한 서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이후 약 100척의 배와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많은 무역 거점과 식민지를 대서양 지역에 수립했다.
◇서인도회사가 나포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 수만 545척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먼저 본거지를 넓혔다. 뉴암스테르담을 포함하는 뉴네덜란드는 오늘날의 뉴욕 일부와 코네티컷, 델라웨어, 뉴저지주 일부를 포함할 정도로 커졌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막강한 무력을 갖추어 은을 싣고 가는 스페인 상선대를 습격하는 해적질은 물론 인근 나라들에 대한 침략도 서슴지 않았다. 사실상의 전쟁기업이었다. 1621년에 네덜란드와 스페인 사이의 휴전이 끝나자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선을 공격하는 것은 속개된 전쟁의 일환이기도 했다. 특히 1628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중남미에서 막대한 은을 싣고 가던 스페인 상선을 쿠바 근처에서 나포해 엄청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1623년에서 1638년 사이에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선대(船隊)에 의해 나포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 수가 무려 545척에 달했다.
◇서인도회사, 식민지를 중남미와 아프리카로 넓혀가다
이 회사는 해상 전투뿐 아니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도 공격했다. 카리브해 앤틸리스제도, 베네수엘라 연안 군도, 수리남, 가이아나를 침략해 무역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황금해안 (현재의 가나)와 앙골라에 무역기지가 세워졌다. 그들은 원주민과 모피거래ㆍ노예무역ㆍ사탕수수 등 열대작물 거래에 중점을 두었다. 지금도 베네수엘라 인근 카리브해에는 쿠라사오(퀴라소) 등 네덜란드령 섬들이 있다.
서인도회사 설립에는 포르투갈에 살았던 개종 유대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들은 서인도회사와 손잡고 대규모로 브라질과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사탕수수 농장과 원목 벌채사업에 뛰어들었다. 유럽에서는 이슬람의 이베리아반도 지배 시절 남부 안달루시아와 포르투갈 등 따뜻한 곳에서만 사탕수수가 재배되어 설탕이 아주 귀했다. 17세기 초까지 설탕은 약국에서 취급될 만큼 귀중한 약재이기도 했다. 당시 설탕이 하도 귀해 같은 무게의 금값과 같았다.
이런 귀한 상품을 유대인들이 놓칠 리 없었다. 포르투갈에 살았던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1625년에 최초로 브라질과 카리브해 섬에 사탕수수를 가져와 경작에 성공했다. 당시 스페인 왕의 지배 아래 있던 페르남부쿠주는 따뜻한 기후, 풍부한 강우량, 완만한 경사지, 비옥하며 고운 흙 등 사탕수수 재배에 유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탕수수 재배지가 되어 121개의 제당 공장이 세워졌다. 헤시페(레시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활발한 항구가 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브라질산 설탕에 매료되었다. 당시 브라질산 설탕은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정제되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카리브해를 거쳐 남미 공략을 시작했다. 특히 설탕 생산이 활발한 브라질에 눈독을 들였다. 서인도회사는 “브라질에서 생산할 수 있는 상품목록”이라는 문서를 통해 “서인도회사가 조속히 스페인 왕으로부터 브라질을 빼앗아야 하는 이유”를 적시했다. 설탕 때문에 전운이 감돌았다.
1630년 2월 서인도회사의 깃발을 단 65척의 함대가 브라질 헤시페 앞 바다에 나타났다. 함대들은 짧은 전투 끝에 헤시페를 무역기지로 삼았다. 이후 그들은 모피거래ㆍ노예무역ㆍ사탕수수 등을 거래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어찌나 컸던지 헤시페 상업 중심지 거리 이름이 ‘Rua dos Judeus’(유대인의 거리)였다. 결국 네덜란드는 동양의 후추 등 향신료 교역은 물론 설탕과 목재 교역에서 유대인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들의 활발한 대외교역의 결과로 네덜란드는 세계교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유대인 사탕수수 농장, 브라질에서 서인도제도로
브라질의 유대인들은 1630년 헤시페에서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했다. 헤시페로 건너간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신자로 위장할 필요가 없었다. 본래의 유대교로 회복하고 시나고그를 세우고 랍비를 초청하여 당당하게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640년 포르투갈의 새로운 왕 주앙 4세가 브라질 내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하면서 1645년 포르투갈이 다시 브라질 식민지의 주도권을 잡자 네덜란드는 1654년 1월 헤시페를 포르투갈에 양도했다. 그러자 그곳에 살던 유대인 1500명은 카리브해 서인도제도(West Indies)로 옮겨갔고 일부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삼각무역이 시작되다
이로써 서인도제도에서 유대인들의 사탕수수 농장이 대규모로 시작되었다.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가 잘 자라고 이윤을 꽤 남길 수 있는 산업적 전망이 보이자, 유대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실어다가 이 지역에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노예, 담배, 설탕의 삼각무역을 통해 유럽으로 실려 가는 설탕과 럼주의 원료인 당밀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무렵 유럽에서 홍차와 커피, 초콜릿 음료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설탕 수요도 급증했다. 마침내 유럽 전체가 설탕의 단맛에 빠지게 되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주식의 연간 수익은 200~300%까지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