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는 라인강과 마스강, 발강 하류에 걸쳐 있어 중세부터 내륙 수로를 이용한 물류가 발달했다. 플류트선은 배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 얕은 수심의 바다나 강에서도 운용할 수 있어 수로를 이용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 화물을 배달했다. 플류트선이 더 이상 못 올라가는 수심이 얕은 강에서는 선상에서 작은 배를 내려 가능한 한 고객 가까이에 화물을 배달해주었다. 이러한 서비스에 고객들은 감동했다.

플류트선. /위키피디아

중세 이래로 라인강 유역 나루터와 상업 도시에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상권을 주도하고 있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 때 가장 많은 학살을 당한 사람들이 라인강 변의 유대인들이었다. 이때 동구와 러시아로 피란 간 유대인 후예들이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뜻의 ‘아슈퀴나지’이다. 16세기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라인강 주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과 협동해 내륙 물류 산업을 장악했다. 또한 당시 유럽의 주요 항구인 앤트워프, 세비야, 런던 등이 얕은 바다를 끼고 있거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플류트선은 화물선으로 가장 효율적인 배였다.

◇네덜란드 포경 산업의 발전

1596년 네덜란드 항해가 빌렘 바렌츠가 북극해의 스발바르 제도를 발견했다. 그 인근에 고래와 물개, 바다코끼리가 많았다. 포경은 기원전 6000년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 인근이 최초 포경지의 하나였다.

초기 포경업은 주로 해안가에서 이뤄졌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몰려 나가 고래가 지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뒤를 쫓아가 호흡이 가빠진 고래가 물 위로 떠오를 때 고래에게 집단으로 작살을 던져 잡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연해에서 고래가 사라지면서 먼바다로 나가게 된다. 먼바다에서 큰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고래를 발견하면, 선상의 작은 배를 내려 노를 저어 가서 작살을 던져 사냥하는 방법이었다.

긴수염고래 사냥. /위키피디아

그런데 대형 고래인 긴수염고래만은 사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고래들은 헤엄치는 속도가 빨라 범선이나 노를 젓는 배로는 따라잡기 어려웠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포를 이용한 작살로 고래 잡는 기술을 발명하여 그곳을 장악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1610년경부터 고래잡이 분야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대량의 고래기름과 고래수염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고래기름은 오랫동안 밤거리 가로등에 사용되었다. 게다가 고래 고기는 찬 음식으로 분류되어 육식이 금지된 금식일에도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선으로 알려져 오랜 기간 서구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 무렵 네덜란드 포경선단은 약 150척에서 250척으로 이루어졌으며 한 해에 잡은 고래 수만 750~ 1250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경선단은 240여 년간 독점적 포경으로 북극해 일대의 고래를 거의 멸종 단계로 몰아넣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신용

16세기 전후 포르투갈이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열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개척한 해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야 했고, 1521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일주한 해로는 남아메리카 남단을 지나야 했다. 네덜란드는 더 빠른 길을 찾고 있었다. 북극 바다를 지나면 아프리카의 희망봉이나 남아메리카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지 않고 빠르게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뱃길을 거치면 1만2000㎞이지만 아프리카를 돌아가면 2만4000㎞이다. 운항 거리와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스페인 왕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면서도 네덜란드는 끊임없이 북동항로를 찾는 배를 내보냈다. 그 선두에 빌렘 바렌츠 선장이 있었다.

백야현상. /위키피디아

빌렘 바렌츠 선장은 북쪽으로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최단 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모험에 나섰다. 그는 1594년 1차 항해에서 이미 노바야젬라 섬에 도달하고 주변 섬들을 발견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듬해 2차 항해에 실패하는 통에 한 푼의 보조금도 받지 못했지만 굴하지 않고 1596년 3차 항해길에 올랐다.

바렌츠 선장은 화물을 싣고 새로운 북극 항로를 찾아 한여름에 3차 항해길에 올랐다. 그들은 여름철이면 24시간 낮이 지속되는 ‘백야 현상’으로 얼지 않은 바다에서 최단 북극 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배는 빙하에 갇히게 된다. 선원들은 닻을 내리고 빙하 위에 올라 갑판을 뜯어 움막을 짓고 불을 지폈다. 그들은 8개월 동안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지냈다. 배의 갑판을 뜯어 불을 피우고, 최소한의 음식으로 버티다 그 식량마저 떨어지자 북극곰과 여우를 사냥해 허기를 채웠다. 그사이 네 명이 죽었다.

바렌츠 선장의 죽음. /위키피디아

선장과 선원들은 1597년 6월 작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항해에 나섰지만, 일주일 뒤 쇠약해진 바렌츠 선장은 숨을 거두었다. 결국 선장을 포함해 8명이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죽어가면서도 위탁받은 화물에 있는 식량과 의복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오십여 일 뒤, 얼음이 풀리면서 생존자 12명이 러시아 상선에 구조되었다.

구조된 선원들이 그해 11월 돌아왔을 때 네덜란드는 감동에 젖었다. 위탁화물인 옷과 식량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얼어 죽고 굶어 죽으면서도 화물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경쟁국에 비해 값싼 운송료와 더불어 네덜란드가 해상운송을 장악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신용’이었다. 냉엄한 도덕률과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명예 의식과 상도의에서 17세기 네덜란드의 번영이 꽃피었다.

사람들은 감동했다. 목숨 바쳐 지킨 ‘상도의’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자부심이 되어,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영원한 기록이 되었다. 유대인의 상업적 재능에 더해진 ‘신뢰’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원양 항해의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그의 <트러스트: 사회도덕과 번영의 창조> 저서에서 ‘신뢰’가 국가 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바로 ‘신뢰’였다.

네덜란드 10유로 동전. /위키피디아

노르웨이와 러시아 북서부 앞에 있는 바렌츠해는 빌렘 바렌츠 선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게다가 바렌츠 선장이 죽기 전해인 1596년에 발견한 스발바르 제도에서 대량의 석탄이 발견되어 네덜란드에 큰 부를 안겨다 주었다. 그는 죽어서도 애국자였다. 47년 짧은 생을 보낸 바렌츠는 네덜란드 10유로짜리 동전의 주인공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청어가 발전시킨 네덜란드 경제

162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어선은 2000척이 넘었는데 대부분 70톤에서 100톤에 이르는 청어잡이 배였다. 선원들이 한 척당 15명 정도 승선했으니 단순 계산으로도 3만 명 이상의 어부가 조업했다. 1630~1640년대에는 연간 약 3만2500톤의 청어를 처리해 당시 유럽 전체 청어 포획량 6만 톤의 절반을 넘겼다. 이렇게 네덜란드의 부는 청어로부터 시작되었다.

청어잡이와 청어의 가공 처리, 통 제작, 망, 어선 건조 등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합하면 그 수가 약 45만 명에 달했다. 당시 국내 노동인구의 태반이 청어와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수산업에서 촉발된 활황은 배 만드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또 목재업·무역업·금융업의 발전을 낳았다. 청어 어업이 네덜란드 경제와 해운 그리고 무역과 금융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대부업이 유대인 몫이 된 이유

고대로부터 이자는 금기시되어 왔다.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자 불임설”을 주장했다. 돈은 그 자체로 이윤을 낳을 수 없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자 받는 행위를 맹렬히 비난했다. “고리대금업은 가장 미움을 받는다. 그것이 미움을 받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 왜냐하면 화폐란 교환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지 이자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자는 고대로부터 비난 받아 왔다.

기독교 또한 이자를 금했다. 이자는 돈을 빌려준 시간에 대해 받는 반대급부인데 시간은 신께 속한 영역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인간이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융’이라 부르지 않고 ‘고리대금’으로 불렀다. 중세는 아무리 값싼 이자라도 어쨌든 이자를 받고 돈을 꿔주면 고리대금이라고 칭했다. 기독교는 교회법인 카논 법률에 이자놀이를 불법으로 명시해 1179년부터 이자 받는 사람들을 아예 파문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교황 니콜라스 5세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처형한, 영원히 저주받을 족속인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순결한 기독교인들을 죄악으로부터 지키도록 했다. 가톨릭이 유대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허용한 것은 어차피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들이니까 이런 역할을 맡겨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대부 활동으로 경제 부흥을 촉진시킬 필요도 있었다.

반면 유대교에서는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는 받을 수 있되 너의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구약성경의 구절을 근거로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탈무드도 이자를 많이 받는 고리대금은 엄격히 금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고리대금업자를 살인자와 동일시했다. 기독교도들은 대부업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이를 기피했고 자연히 대부업은 유대인의 몫이 되었다. 그 때문에 중세 기독교 국가의 왕실과 귀족들은 국고 관리를 주로 유대인에게 맡겼다. 유대인의 대부업은 이자를 원천적으로 부정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자 제한 폐지로 채권 시장이 활성화되다

117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대금업자는 파문한다”고 선언하자 각국 군주가 돈 빌리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후 기독교 사회에서는 과연 대금업이 무엇이냐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이어졌다. 한편 국제 무역이 증가하면서, 어음 거래 또한 늘어났다. 어음 거래를 막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아 어음 거래는 금융 거래가 아닌 매매의 연장이므로 대금업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자 자금 융통을 위해 어음을 발행하면서도 마치 실제 거래가 있었던 것처럼 꾸몄다. 이런 어음을 ‘건식 어음’이라 했다.

상업상의 실제 어음과 건식 어음을 구분해 가려내는 일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16세기 초 프랑스 신학자 장 거송(Jean Gerson)이 “차입자를 가혹하게 옥죌 목적으로 대출할 때”만 대금업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독일의 에크(Eck)는 『5% 계약에 관한 연구』(1515년)라는 책을 통해 5% 이자야말로 하느님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합리적 상한선이라고 거들었다. 푸거 가문에서 뒷돈을 댄 결과였다. 그러자 교황 레오 10세가 같은 해 『가난한 사람을 위한 대출법』을 통해 5%의 이자 수취를 합법화했다. 레오 10세는 다름 아닌 메디치 은행 대표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위대한 로렌초(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이었다.

그 무렵 광산업을 통해 큰돈을 번 북부 독일의 유대 푸거가에 빚 지지 않은 통치자들은 별로 없었다. 당시 푸거가는 바티칸 교황청의 최대 채권자였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대부업 금지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1517년 ‘라테라노 공의회’는 이자 받는 대부업에 대한 대부분의 금지 조항을 폐지했다. 금융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이때부터 유럽 금융의 중심은 북부 독일 한자 도시들에서 유대인이 금융을 주도하는 앤트워프로 이동했다.

1545년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칼뱅이 레오 10세의 결정에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왜 이자가 꼭 5%이어야 하는가? 칼뱅이 히브리 성경을 오래 연구한 결과 대금업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는 두 가지였다. “깨문다”는 뜻의 네섹(neshek)과 “늘린다”는 뜻의 타빗(tarbit)이었다. 이 중 성경에서 명백히 금지하는 것은 네섹뿐이라는 것이 칼뱅의 결론이었다. 갚을 능력이 없는 불쌍한 자는 깨물지 말고 대가 없이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얼마든지 이자를 받고 대출해줄 수 있는 것이다. 칼뱅은 대금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가톨릭의 경제관을 뒤집었다.

이는 사회적으로 금융업이 공인되고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자금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이자가 결정되었다. 곧 빌리려는 돈보다 빌려주려고 하는 돈이 적으면 이자는 올라가지만, 그 반대 현상 곧 빌리려는 돈보다 빌려주는 돈이 더 많으면 이자는 내려갔다. 이로써 수급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채권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저지대 채권시장의 탄생

앤트워프 유대인들은 상업과 무역에 환어음과 차용증 제도를 정착시켜 신용사회를 구축했다. 당시 저지대에서는 ‘부채증서의 양도에 관한 법률’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토대로 유대 상인들은 환어음을 통해 빠르게 자본을 모으고 순환시킬 수 있어 은행 등 금융업이 발달해 신용거래 기초를 마련했다.

이러한 신용을 바탕으로 1550년대 유대 금융인들은 채권시장을 활성화시켜 정부도 강제 공채제도 대신 채권시장을 통해 공채를 발행해 대부받는 관행을 정착시켰다. 당시에는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평소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전쟁 공채를 사서 전쟁 자금을 지원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 전통은 강제화되었다.

저지대 주 정부와 도시들은 세 종류의 공채를 발행했다. ‘오블리가티엔(Obligatien: 단기채권)’은 ‘무기명 채권’으로 이를 소지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은행에서 현금으로 매각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중세 베네치아 이래로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무기명 유가증권을 선호했다.

장기 채권으로는 ‘로스렌텐(Losrenten)’이 있었다. 이는 종신연금으로 무기명 채권과 달리 공적 원장에 자기 이름을 등록하고 정기 이자를 받았다. 이 증권은 시장에서 매매될 수 있었고, 소지자가 죽으면 상속되었다. 마지막으로 ‘레이프렌텐(Lijfrenten)’이 있는데 이는 소지자가 죽으면 지급이 중단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로스렌텐과 비슷했다. 곧 사망하면 지급이 중단되는 종신형 연금과 후손에게 대물림이 가능한 상속형 연금의 차이였다. 이러한 채권시장이 가장 발달한 곳은 유대인이 많이 모여든 앤트워프였다. 영국 왕실도 큰돈이 필요한 경우 앤트워프에서 융통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