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https://youtu.be/q1JO1XZlVaI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황족에서 일본 왕족으로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황실은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 식민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하다. 고종이 뛰어난 지략가로 외세를 잘 이용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고 해도 그 책임은 면할 수 없다.’ 2004년 김윤희, 이욱, 홍준화라는 세 역사학자가 쓴 ‘조선의 최후’(다른세상)에 나오는 글이다.

한 나라 그것도 500년 지속해온 왕국이 똑같은 기간 멸시해온 오랑캐 일본에 식민지가 됐는데, 대한제국 초대황제 광무제 고종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을사오적을 죽이라 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40년 넘도록 그 나라를 이끌었던 이 황제를 일본은 죽이거나 신분을 떨어뜨려 모멸감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고종과 그 가족을 천황 황명으로 조선 왕(王)과 조선 공(公)에 책봉해 식민시대 내내 우대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천황 메이지가 내린 조령은 이러했다.

‘전 한국 황제(韓國皇帝·순종)를 책봉하여 왕(王)으로 삼고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이라 칭하니 이 융숭한 하사를 세습해 종사(宗祀)를 받들게 한다. 태황제(太皇帝·고종)를 태왕(太王)으로 삼아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라 칭한다. 그 배필을 왕비, 태왕비 또는 왕세자비로 삼아 모두 황족(皇族)의 예로써 대한다.’(1910년 8월 29일 ‘순종실록’)

고종과 순종 직계 혈족인 이들이 ‘조선 왕족(王族)’이다. 그리고, ‘이강(고종 아들) 및 이희(고종 형)는 이왕(李王)의 친족으로 공(公)으로 삼고 그 배필을 공비(公妃)로 삼아 세습해 황족의 예로써 대한다.’

이 고종과 순종 형제들이 ‘조선 공족(公族)’이다. 메이지 조령은 이렇게 이어진다. ‘일본 황족으로서 대대손손 세습해 복록(福祿)을 더욱 편안히 하여 영구히 행복을 누리게 한다.’

문장 하나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왕 가문은 천황 황족과 같은 왕공족으로 세습 신분과 재산을 보장한다.’

식민시대 35년 위 학자들 표현대로 ‘을사오적보다 더 호의호식했던’ 이들 왕공족의 삶을 들여다본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나라가 망한 이유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땅의 역사 301. 식민 조선의 왕공족(王公族) ①고종의 자녀들

1901년 이전 촬영한 고종과 순종과 영친왕 이은(왼쪽 두루마기 차림). 고종은 왕비 민씨가 죽고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한 뒤 그곳에서 엄비와 생활했다. 영친왕은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하고 6개월 뒤인 1897년 8월 17일 태어났다. /버튼 홈즈, ‘1901년 서울을 걷다’, 푸른길, 2012

도쿠주노미야이태왕(德壽宮李太王)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졌다. “나는 밀사를 보낸 적 없다”고 고종은 극구 부인했다.(‘통감부문서’ 5권 1.헤이그밀사사건급한일협약체결 (9)밀사 파견에 대한 한국 황제에의 엄중 경고 및 대한 정책에 관한 묘의 결정 품청 건)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한제국으로부터 세권(稅權)과 군사권, 재판권을 빼앗아버렸다.(앞 문서, (3)헤이그 체재 한국 황제의 밀사 성명·자격 조회 및 대한 조치에 관한 건) 7월 16일 을사오적을 포함한 제국 내각 대신들이 고종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버티던 고종은 결국 7월 20일 양위식을 치렀다. 고종도 순종도 없이 내시가 의례를 대신하는 권정례(權停例)로 황제가 바뀌었다.(1907년 7월 19일 ‘고종실록’)

고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대한제국 황궁은 고종이 살던 경운궁에서 융희제 순종이 새로 거처를 정한 창덕궁으로 바뀌었다. 경운궁은 궁호가 덕수궁(德壽宮)으로 변경됐다. 조선 개국 직후인 1400년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개경에 지은 궁궐 이름과 같다.(1400년 음 6월 1일, 1907년 양 8월 2일 ‘순종실록’) 이후 고종은 1919년 사망할 때까지 덕수궁이태왕, 도쿠주노미야이태왕으로 불렸다. 창덕궁에 살던 순종은 창덕궁이왕, 쇼도쿠노미야이왕이라 불렸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고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그들은 그렇게 불렸다. 왜? 일본 천황 메이지가 그들을 조선 왕으로 책봉했으니까.

식민지 왕의 일상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 옛 황궁에서 이태왕은 심심하게 살았다. 덕수궁 일상을 일지로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 일기’에는 고종의 하루 일과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1911년 2월 1일 찬시실 일기에 따르면 고종은 새벽 3시에 함녕전 침실 잠자리에 든 뒤 오전 10시40분에 잠에서 깼다. 11시30분 각종 탕약과 차를 마신 뒤 당직자 보고를 받고 오후 1시20분 점심을 먹었다. 이어 간식 차를 마신 뒤 야간 당직자 명단을 보고받고 조선 귀족과 고위직을 접견했다. 저녁은 오후 6시20분에 먹었고 오후 7시에는 역대 조선 국왕 초상화를 모신 선원전과 위패들을 모신 경효전, 의효전 보고를 받았다. 경효전은 첫 왕비 민씨 위패를 모신 곳이고 의효전은 첫 며느리 민씨 위패를 모신 곳이다. 오후 9시55분에 야식을 먹고 이날은 새벽 2시35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 일상이 계속적으로 반복됐다.(신명호, ‘덕수궁 찬시실 편찬의 일기 자료를 통해본 식민지 시대 고종의 일상’, 장서각 23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그런데 고종이 덕수궁에 같이 살았던 식구는 태왕비로 호칭이 바뀐 영친왕 친모, 황귀비(皇貴妃) 엄씨와 후궁들이었다.

아관파천 중 잉태된 영친왕

1897년 10월 20일 상궁 엄씨가 아들을 낳았다. 제국을 선포하고 1주가 지난 날이었다. 이 아들이 영친왕 이은이다. 아들이 태어나고 이틀 뒤 고종은 엄 상궁을 후궁인 귀인(貴人)으로 승격시켰다. 3년 뒤인 1900년 8월 3일 고종은 귀인 엄씨를 정1품 후궁인 빈(嬪)으로 승격시키고 그녀를 순빈(淳嬪)으로 봉작했다. 그날 고종은 또 다른 후궁 귀빈 이씨를 정2품 후궁 소의(昭儀)로 봉했다. 소의 이씨 또한 일찍 딸을 낳았었는데 요절했다.(이상 ‘고종실록’, ‘순종실록부록’)

‘순종실록부록’에는 ‘소의 이씨가 낳은 딸이 요절하자 엄비가 대신 입궁했다’라고 기록돼 있다.(1911년 9월 1일 ‘순종실록부록’) 그런데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고종이 전 상궁 엄씨를 불러 계비(繼妃)로 입궁시켰다. 민 왕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고종이 두려워하여 감히 그와 만나지 못하였다. 10년 전 고종은 우연히 엄씨와 정을 맺었는데, 민후가 크게 노하여 죽이려 했지만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여 밖으로 쫓겨났다가 이때 그를 부른 것이다. 시해 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5일째 되던 날이었다.’(황현, ‘매천야록’ 2, 1895년 ③ 11. 상궁 엄씨의 입궁, 국사편찬위)

그러니까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고 닷새 뒤에 옛 연인을 불러들였다는 뜻이다. 황현 기록에는 ‘도성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넉 달 뒤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달아난 ‘아관파천’도 엄 상궁이 주도한 일이었고,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8개월 뒤 영친왕이 태어났으니 이은은 그 러시아공사관에서 잉태된 아들이었다.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10월 5일 황제 고종은 황귀비 엄씨에게 서봉대수훈장(瑞鳳大綬勳章)을 수여했다. 서봉장은 1904년 3월 신설한 여자 전용 훈장이며 황귀비는 그 첫 수훈자였다.

경운궁(덕수궁)에서 촬영된 고종과 둘째아들 영친왕 이은. 1907년 황제위에서 강제로 퇴위된 뒤 영친왕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으로 추정된다. /국립고궁박물관

1911년 7월 엄비의 죽음 1912년 5월 덕혜의 탄생

1911년 7월 20일 태왕비 엄씨가 죽었다. 장례는 8월 20일 치러졌고 위패는 엄씨가 살던 덕수궁 영복당에 모셔졌다. 영복당 권역은 궁녀들이 살던 공간이었다. 1912년 고종에게 딸이 태어났다. 이 딸이 고종이 아꼈던 외동딸 덕혜옹주다. 어머니는 궁녀 양춘기였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날은 양력 5월 25일이었다. 엄비 장례 기간에 덕혜가 잉태된 것이다. 소주방(주방) 궁녀였던 양씨는 복녕당(福寧堂)이라는 당호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1852년생인 고종은 그해 환갑을 넘겼고 양씨는 서른 살이었다. 창덕궁에 살던 고종 맏아들 순종은 38세였다.

고종은 딸이 태어난 날 궁녀 방을 찾아가 딸과 딸의 엄마를 부둥켜안았다. 이후 고종은 하루에 두세 번씩 복녕당을 찾아가 시간을 보내고 함녕전으로 돌아오곤 했다. 딸이 태어나고 한 달 보름이 지난 7월 13일 고종은 아기를 함녕전으로 데려와버렸다. 친엄마 복녕당 양씨는 함께 오지 못했다. 대신 변복동이라는 유모가 아기를 길렀다. 아기는 오래도록 이름 없이 ‘복녕당 아기씨(福寧堂阿只)’라 불리다가 1921년 5월 4일 아홉 살 생일을 21일 앞두고 배 다른 오라버니 순종에 의해 ‘덕혜(德惠)’라는 이름을 받았다.(1921년 5월 4일 ‘순종실록부록’)

후궁이 낳은 딸이라 공주가 아니라 옹주였고, 그래서 우리가 ‘덕혜옹주’라 부르는 그녀는 불우하게 살았다. 일본으로 반 강제 유학을 떠난 덕혜는 1929년 5월 친엄마 복녕당이 유방암 후유증으로 죽었을 때 귀국했다. 일주일 남짓한 장례를 마치고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간 덕혜는 대마도 번주 장손과 결혼했지만 이내 소아성 치매를 앓다가 이혼했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덕혜옹주 생모 복녕당 양씨. 엄비 사망 직후 장례 기간 고종 승은으로 덕혜를 회임했다. /국립고궁박물관

덕혜의 두 남동생

덕혜가 고종에게 막내딸은 맞지만 막내 자식은 아니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이 지난 1914년 7월 3일 밤 고종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을 낳은 여자는 궁녀 이완덕이었다. 나이 열셋에 세수간 궁녀로 입궐했던 이씨는 스물여덟 살에 승은을 입고 이듬해 아들을 낳고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고종은 예순두 살이었다. 아들 이름은 육(堉)이었다. 고종은 이번에는 아들 육과 친모 광화당을 함녕전으로 불러들여 같이 살았다.

한 해가 지나 1915년 8월 20일 예순셋 먹은 고종에게 또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우(堣)라 지었다. 친모는 서른세 살 먹은 궁녀 정씨였다. 정씨는 보현당이라는 당호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아들 우는 친어머니 곁을 떠나 함녕전에서 아버지와 배 다른 형제들과 함께 살았다. 짧지만 함녕전에는 네 살배기 덕혜와 두 살짜리 이육, 석 달배기 이우 세 남매가 아버지 고종과 함께 살았다. 그런데 광화당이 낳은 아들 육은 1916년 1월 22일에, 보현당이 낳은 아들 우는 반년 뒤인 7월 25일 요절했다.

고종은 또 김옥기라는 또 다른 궁녀를 후궁으로 들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해 후궁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훗날 순종이 그녀에게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이들 후궁은 모두 고종 생전부터 급료를 받았다. 1926년 3월 복녕당이 받은 월급은 580원이었고 보현당은 280원, 광화당은 480원, 후궁이 되지 못한 김씨 삼축당은 115원을 받았다.(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일지사, 1987, p11)

1919년 고종이 죽었다. 고종과 함께 살았던 후궁들은 사간동에 지어준 집에 함께 살았다. 후궁 신분을 일본 황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에, 이들 가운데 덕혜옹주를 제외한 그 누구도 왕족이나 공족에 책봉되지 못했다. 요절한 우와 육은 서삼릉 고종왕자묘에 묻혀 있고, 그 태항아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망국 황제 고종은 그렇게 그들과 함께 살았다. <다음주 계속>

덕혜옹주의 남동생들인 고종 8남(왼쪽)과 9남 태항아리. 두 사람 모두 출생 후 아기 시절에 요절했다./국립고궁박물관
아기 덕혜옹주 기념사진. 고종 막내딸인 덕혜옹주는 엄비가 죽고 10개월 뒤 후궁 복녕당 양씨와 고종 사이에 태어났다. /국립고궁박물관
1929년 6월 벌어진 복녕당 양씨 장례식 장면. 유방암을 앓던 양씨가 투병 끝에 사망하자 일본에 있던 딸 덕혜옹주가 급거 귀국했다. 사진은 1929년 6월 6일자 '조선신문'에 실린 장례장면과 상복을 입은 덕혜옹주. /국립중앙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