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겪은 일이다. 조선일보 도쿄지국이 있는 건물에서 코로나 환자가 잇달아 발생했다. 바로 위층 민간 기업 직원 2명의 확진 판정. 하는 수 없이 자택 근무를 시작했다. 집에서 일하는 도중 일본의 A 의원과 인터뷰할 일이 생겼다. A 의원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명함을 교환했던 비서관이 “질문지를 팩스로 보내달라”고 했다.

이런 답변은 도쿄에서 근무하면서 일상적으로 겪어왔기에 놀라지 않았다. 다만, 집에 프린터와 팩스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정중한 일본어로 부탁했다. “죄송하오나 코로나 때문에 자택 근무 중이므로 이메일로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비서관은 친절했으나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편의점에 가서 팩스로 보내주세요.” 설득이 통하지 않았다. 잠시 궁리한 끝에 국제 팩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한국의 후배 기자와 업무직 사원에게 각각 연락해 사정을 설명했다. 서울로 이메일 발송→편집국에서 질문지 인쇄→도쿄로 팩스 발송하는 3단계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A 의원 측은 둘 중 어느 것도 수신되지 않았다며 그제야 이메일을 알려줬다. 이메일을 그쪽에 보내고 답신을 받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간단하게 끝날 일이 질문지가 동해(東海)를 네 차례 오간 후에야 완료됐다.

일본에서의 특파원 생활은 한국에서는 사라져 가는 팩스와의 동행(同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관공서에 연락하면 대부분 팩스로 요망 사항을 보내 달라고 한다. 국회의원 사무실은 말할 것도 없다. 니혼게이자이신문 26일 자 사설에 일본 공무원들의 86%가 의원들과의 업무는 팩스로 한다는 조사가 실렸다. 그만큼 나가타초(永田町·일본 국회가 있는 곳)엔 팩스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일 외무성이 리셉션을 개최할 때도 마찬가지다. 도쿄 주재 외교관과 특파원이 팩스로 답신하는 것이 매뉴얼이다. “이메일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문의했다가 역시 친절한 목소리의 공무원에게 거절당했다.

일본의 팩스 문화는 올해 코로나 사태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도쿄도(都)가 팩스 2대로 1400만 도민의 건강 상태를 취합하는 것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도내 31개 보건소로부터 팩스로 코로나 감염자를 보고받다가 ‘쨈’이 걸리는 바람에 감염자 누락, 중복 집계 현상이 발생했다.

일본은 지구에서 3억㎞ 떨어진 소행성에 탐사선을 보낼 정도의 과학기술력을 가진 나라다. 달에 우주비행사를 보내는 미국의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엔 핵심 파트너로 참가한다. 이런 나라에서 팩스를 고집하는 부조화(不調和)에는 현기증이 난다. 일본인들은 ‘팍스 재패니즈(Pax Japanese·일본에 의한 평화)’를 꿈꿔왔는데 그 대신에 팩스를 애용하는 ‘팩스(Fax) 재패니즈’ 제국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 같다.

팩스는 보내는 사람은 힘들지만, 수신인은 즉각 문서를 집어서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아날로그 시대의 종적(縱的) 관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꼽힌다. 일본 사회는 여전히 자민당이라는 거대 정당과 관(官)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에게만 편리한 팩스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 사회는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다’는 의미의 강약약강(强弱弱强) 문화가 잔존해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것들이 을(乙)의 처지를 배려하지 않는 팩스 문화로 나타나는 것 아닐까.

마침 지난달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디지털 개혁상 신설, 관공서의 도장 없애기와 함께 종적 관계 청산을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부디 그의 개혁이 결실을 거둬 구(舊)시대 문화를 개선하고 한국에도 새로운 자극을 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