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공단이 담배 회사들을 상대로 “폐암 환자 등의 치료비로 지급된 건보 재정 533억원을 배상하라”며 제기한 이른바 ‘담배 소송’에서 또 졌다. 건보공단은 “과학과 법의 괴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실망스럽다”면서 대법원에 상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5일 서울고등법원 민사6부(재판장 박해빈)는 건보공단이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지난 2020년 1심 때와 마찬가지로 “건보공단의 보험 급여 지출은 손해배상 청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이 소송은 건보공단이 흡연 폐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해 2014년 제기하면서 비롯됐다. 공단은 “하루 한 갑씩 20년 이상 담배를 피웠거나 30년 이상 피운 폐암·후두암 환자 3465명에게 지급된 건보 급여비가 533억원”이라며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폐암은 발생자 수만 보면 갑상선암(약 24만명·2022년 기준), 대장암(약 3만3000명)에 이어 3위(약 3만2000명)이지만, 사망자는 암 전체 중 1위다. 국립암지식정보센터에 따르면, 전체 암 사망자(8만8933명) 중 폐암(1만9401명·2024년 기준)이 가장 많다.
이날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공단 측 주장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공단이 지급한 보험 급여는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른 보험자의 의무 이행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폐암·후두암 환자 치료비 지급은 건보공단이 당연히 할 일이지 손해를 본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담배 회사들이 더 안전하고 중독성이 적은 제품을 만들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니코틴을 어느 수준까지 낮추면 안전하다고 일반화할 수 있는지 학계의 확립된 기준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경고 문구를 제대로 표시하지 않아 1960~70년대 흡연자들이 담배의 중독성과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담배가 건강에 해롭고 중독성이 있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사회 전반에 알려졌다”고 했다.
건보공단은 재판 과정에서 ‘흡연자가 비흡연자보다 폐암 등의 발병률이 더 높다’는 역학조사 결과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담배 회사들의 불법 행위가 증명되지 않아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는 이상, 흡연과 암 발생 사이의 개별 인과 관계에 대해선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판결 선고 직후,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기자들과 만나 “담배 회사는 뺑소니범이라고 생각한다. 교통사고를 내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사망했는데 운전자가 도망가 버린 것”이라며 “담배 회사들이 담배를 판 수많은 이익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동안 국민들은 오늘도 병실에서 아파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고할 계획을 밝히면서 “진리는 언젠가 인정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