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기자 지난 8일 울산 울주군에서 장학금을 기부한 김교동(오른쪽)씨와 부인 이진로씨가 사랑의열매 모형을 잡고 웃고 있다.

“어려운 아이들한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지난 6월 23일 사랑의열매 울산지회를 찾은 백발의 김교동(81) 씨는 물 빠진 남색 재킷 속에서 1억원짜리 수표를 꺼내 건넸다. 그는 이날 바로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이보다 며칠 전 그와 아내 이진로(76)씨는 본인들의 모교인 울산의 두 초등학교를 찾아가 학교당 5000만원씩 총 1억원을 기부했다. 6월에만 장학금 2억원을 기부한 것이다. 아내 이씨는 “집이 어려워도 힘들다는 말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 돈이 쓰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 부부는 모두 초졸이다. 이들이 장학금을 건넨 두 초등학교는 그들이 다닌 유일한 학교이자, 두 사람의 ‘월사금(학비) 눈물’이 배어 있는 곳이다. 남편 김씨는 형편이 어려워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해 18세에 졸업했다. 그는 다달이 내야 하는 월사금을 못 내 수업 도중 “집에 가서 월사금 갖고 오라”는 호통을 듣고 교실에서 쫓겨나는 날이 많았다. 김씨는 “집에 가도 월사금이 나올 리가 있겠나. 길가에 앉아 우는데 ‘이렇게 살아 뭐 하겠나’ 싶더라”고 했다. 아내 이씨는 “월사금 가지러 집에 갔다가 빈손으로 오면 벌로 화장실 청소를 했다”며 “청소를 마치면 저녁이라 혼자 캄캄한 고갯길을 넘어 집에 갔는데, 무섭고 괴로워서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김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입대해 21세에 제대했다. 그때부터 공사판을 전전하며 페인트칠을 했다. 페인트칠 일거리가 없을 땐 굶어야 하는 날이 많았다. 그는 “종일 남의 논·밭일을 해주면 품삯은 안 줘도, 다행히 밥은 줬다”고 했다. 김씨가 서른 살 되던 해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 후 이씨는 직물 공장을 다니며 거의 매일 밤 12시까지 잔업을 했다. 쉬는 날엔 빈병을 주워 팔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 남매 자녀를 키웠다.

부부는 1974년 집 옆의 남는 대지를 판 돈에 그간 모은 돈을 보태 울산 남구 공업탑 주변의 땅을 샀다. 거기에 4층짜리 건물을 올렸는데, 돈이 모자라 인부는 최소한으로 쓰고 부부가 직접 벽돌과 모래를 지고 운반하며 건물을 지었다. 완성까지 4년이 걸렸다. 김씨는 “그때는 하도 어려워서 결혼 패물까지 팔았다”며 “아내가 무거운 걸 들다가 허리 디스크가 왔는데 그게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부부는 현재 울산 울주군의 22평(76㎡)짜리 아파트에 둘이 산다. 오 남매 자녀 모두 장성해 결혼했다. 김씨는 “저와 아내도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나”라며 “모아 둔 돈도 있고, 내 발로 걸어가 기부할 체력도 있을 때 미루지 말고 기부를 하자고 올해 초에 아내에게 말했다”고 했다. 아내 이씨도 동의하며 “모교에 꼭 기부하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주변에선 ‘네가 그렇게 힘들 때 학교에서 월사금 보태준 것도 없는데 왜 기부를 하느냐’는 말도 했다”며 “세월이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저처럼 골짜기에서 우는 아이가 있을까 봐 꼭 기부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자녀들도 지지를 해줬다. 미국에 사는 사위는 장인·장모의 기부 결심을 듣고 김씨에게 ‘두 분을 본받고 싶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김씨 부부는 그간 모은 돈 2억원 중 1억원을 모교에 전달하고, 울산 지역의 다른 어려운 학생들에게 사랑의열매를 통해 1억원을 기부했다.

김씨는 “기부를 하니 어릴 적 상처가 아무는 것 같아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아내 이씨는 “남 줄 때 기분이 좋다더니 정말 그렇더라”며 “여력이 생기면 이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에게 기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동기획: 조선일보사·사랑의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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