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조모(41)씨는 초등학교 4학년인 첫째 아들(10)에게 올해 3월부터 성장호르몬 주사를 놓고 있다. 일주일에 6일씩, 밤에 조씨가 아들에게 직접 주사한다. 성장 전문 클리닉에서 처방받았는데, 주삿값만 하루 2만원이다. 연간 600만원이 넘는다. 조씨는 “아들이 또래 중 키가 하위 20%라 조금이라도 더 클까 싶어 비용은 부담되지만 주사를 결심했다”고 했다.
아이 키를 더 크게 하려고 성장호르몬 주사를 놓는 부모가 급증하고 있다. 애초 질병 치료를 위한 전문 의약품인데, 목적에 맞지 않게 남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서미화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 내 의원급 병원과 약국에 공급된 성장호르몬제(소마트로핀·소마트로곤 성분)는 2020년 39만430개였지만, 지난해 113만275개로 4년 만에 2.9배로 급증했다. 올해 1~7월 공급량은 이미 76만3867개로 지난해 기록을 뛰어넘을 전망이다.
성장호르몬 주사는 성장호르몬이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키가 지나치게 작은 저신장증 환자 등을 위한 전문 치료제다. 이런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서 키가 하위 3% 이내라는 조건 등을 충족하면 건강보험 급여로 처방받을 수 있다.
하지만 조씨 아들처럼 이 기준에 들지 않아도 비급여 처방이 가능하다. 실제 처방되는 성장호르몬 대부분은 비급여로 알려졌다. 이런 처방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 클리닉도 곳곳에 성업 중이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무분별한 성장호르몬 주사는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질병이 없는 정상 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치료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다룬 연구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호르몬제이다 보니 과다 사용하거나 정상인에게 투여하면 피부 발진, 혈압 상승, 척추측만증 등 부작용이 생길 위험도 있다.
한국보건의료원은 지난 5월 “성장호르몬이 국내에서 치료가 아닌 키 성장을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의료원이 최근 5년 이내 성장호르몬 주사제를 사용한 아동의 보호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0%는 ‘아이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고 답했다. 응답 아동 6명 중 1명은 평균보다 키가 컸다.
그런데도 ‘주사를 놓아야 하나’ 고민하는 학부모는 계속 늘어나는 분위기다. 직장인 유모(42)씨는 “초등학생 아이가 키가 작은 편이라, 주사를 맞혀야 하나 요즘 고민”이라고 했다. 네 살 아이를 둔 직장인 박모(43)씨도 “아이가 좀 더 크면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혀야 하나 고민”이라고 했다.
주사 비용이 많이 비싸다 보니 소득 높은 지역일수록 주사를 많이 놓는 경향이 뚜렷했다. 서미화 의원이 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1~7월 서울에 공급된 성장호르몬 주사의 63.8%가 ‘강남 3구’로 불리는 서울 강남·서초·송파구에 집중됐다. 강남구 26만186개(34.06%), 서초구 14만9294개(19.54%), 송파구 7만8249개(10.24%) 등이다. 학군지인 목동이 포함된 양천구가 5만3894개(6.27%)로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마포구(5843개·0.76%), 영등포구(5646개·0.74%) 등 12개 구는 전체 중 비중이 1%도 채 되지 않았다.
서미화 의원은 “치료 목적이 아닌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비급여 성장호르몬제가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며 “대책이 시급하다”고 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소아과 전문의는 “부모들이 아이 키에 민감해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주사보단 충분한 운동과 수면, 균형 잡힌 영양 공급 등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