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뇨기과 병원장인 전문의 A씨는 지난 2023년 의료 분쟁 조정 신청이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조정을 신청한 환자 B씨는 2016년 이 병원을 A씨가 아니라 다른 의사가 운영할 때 시술을 받았다. 결과는 ‘조정 불성립’. 그럼에도 B씨는 같은 내용으로 다시 8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최근 법원에서 모두 기각했지만, 이 같은 결론이 나오기까지 A씨는 약 2년간 극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증 등을 호소했다.

산부인과 의사 C씨는 5년간 민사소송에 시달렸다. 제왕절개 수술을 받은 산모가 급성 폐색전증(피떡이 폐혈관을 막는 질병)으로 뇌 손상을 입었는데, 환자 가족이 C씨를 상대로 20억원이 넘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1·2심 모두 ‘제왕절개 수술뿐 아니라 경과 관찰과 응급 조치 모두 적절하게 이뤄졌다’며 C씨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C씨는 심한 스트레스로 더 이상 분만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A씨와 C씨 사례처럼 의사들이 의료 분쟁 소송에 걸리는 경우, 1심 판결을 받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일반 민사소송의 3배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3일 국회 보건복지위 한지아 의원(국민의힘)이 대법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민사소송 1심 소장 접수부터 판결까지 평균 7.4개월(올해 상반기 기준)이 걸렸다. 이 중 의료 사건만 따로 떼어내 계산해보니, 의료 분쟁 민사소송 1심은 24.6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3.3배나 더 긴 셈이다. 내용이 전문적인 의료 소송 특성을 감안해도 오랜 기간 법적 부담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소송 당사자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의료계에선 “이를 악용해 의사를 괴롭히거나 합의금을 더 받기 위해 다짜고짜 소송부터 거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법원에선 소를 제기한 환자 측(원고)보다는 의사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 2015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법원에 접수된 의료 분쟁 소송(1만1577건) 가운데 환자 측이 이긴 ‘원고 승’ 비율은 1.8%(213건)에 불과했고 ‘원고 일부 승’ 비율도 27.2%(3148건)에 그쳤다. 같은 기간 민사소송 전체(933만2314건)의 ‘원고 승’ 비율은 49.9%에 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반면 ‘원고(환자) 패’ 비율은 28.6%(3310건)로, 일반 민사소송의 ‘원고 패’ 비율(5%)보다 월등히 높았다. 법무법인 세승의 한진 변호사(의료 전문)는 “의료 민사소송의 경우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 일반 소송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과실을 입증해야 하는 환자 측 승소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도 “소송이 장기화되면 환자뿐 아니라 의료진에게도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의료 소송에선 원고 측이 민사소송 승기를 잡기 위해 형사 고소를 병행하는 경우도 많은데, 의사들은 “경찰서와 법원을 몇 년씩 드나들다 보면 일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정부는 의사들의 민사소송 리스크를 완화해주기 위해 의료기관 개설자가 의료 사고에 대한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등의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지난해 밝혔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내용은 정해지지 않았다.

의료 분쟁이 반드시 소송을 통해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빠르고, 쉽게 의료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2012년 ‘의료 분쟁 조정 제도’를 도입했다. 소송 대신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조정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한지아 의원실이 중재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0~2025년 8월까지 5년 8개월 동안 1만2352건의 신청이 들어올 정도로 활성화돼 있다. 여기서도 과별 편차가 심했다. 정형외과의 경우 이 기간 총 2250건으로 가장 많은 신청이 들어왔다. 가정의학과(145건)의 15배 수치다. 필수과인 내과(1674건·2위), 외과(791건·5위), 산부인과(625건·7위), 응급의학과(388·10위)가 신청 건수 상위 10위에 들었다.

한지아 의원은 “환자들이 민사와 함께 형사 고소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아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까지 과잉 범죄화 되고 있어 국민에게 꼭 필요한 필수 의료가 위축되고 있다”며 “정부가 의료 분쟁 조정 기능과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