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뇌성마비를 앓게 되자 분만을 도왔던 산부인과 의료진이 수억 원대 배상 판결에 이어 형사재판까지 받는 일이 발생해 의료계가 들끓고 있다. 지난 15일 전국 21개 대학 30~40대 산과 교수들은 성명을 내고 “분만이란 일상적 업무 속에서 러시안 룰렛과 같이 발생하는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가 형사 기소의 대상이 되는 현실 앞에서 절망을 느낀다.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16일 의료계 등에 따르면, 분당서울대병원 산부인과 A교수와 전문의 B씨는 지난달 26일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형사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2018년 집도한 분만이 문제가 됐다. 당시 A교수와 3년 차 전공의였던 B씨는 같은 병원 마취통증의학과 전임의였던 산모 C씨의 출산을 맡았다. C씨는 그해 12월 22일 오전 5시 무렵 진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왔고, 오후 3시 41분 자연분만으로 출산했다. 출산 직후 아기는 태변 흡입, 호흡곤란 등으로 저체온 요법 치료를 받았다. 수일 뒤 뇌파 검사 결과 뇌기능 장애가 있었고, 이후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C씨 측은 2021년 A교수와 B씨, 병원 등을 상대로 24억원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분만 과정에서 태아의 심박동수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는 등 의료진의 과실로 아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장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소송 제기 4년 만인 지난 5월 “A교수 등이 C씨 측에 6억5000여 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의료진이 태아를 제대로 관찰하지 않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과실이 있다고 봤다. 다만 “경미한 과실”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아이가 출생 후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것을 고려하면 과실의 결과가 중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대 의학 지식 자체의 불완전성 등으로 아이의 뇌성마비에 산모 등의 영향이 없었는지를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하기는 불가능하다”며 의료진의 책임을 30%로 제한했다.
산과 의사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조금준 고려대구로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경미한 과실이더라도 수억 원대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게 앞으로의 ‘가이드 라인’이 될 수 있다”며 “대학병원이 아닌 개원가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당장 병원을 닫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이번 사안이 ‘제2의 이대목동병원 사건’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환아 4명이 같은 날 사망한 이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의료진이 재판에 넘겨졌고, 이후 무죄판결이 확정됐지만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은 크게 떨어졌다. 김영태 대한산부인과학회장은 “산부인과도 소아과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산과 분야가 절멸되는 상황으로 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정부는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을 통해 산과를 비롯한 필수 의료 분야의 ‘사법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당초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을 추진했으나, 환자단체의 반발로 선회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만들어진 ‘의료개혁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의료진의 형사 면책 범위 등에 대해 추가로 논의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 외에 올해 7월부터는 불가항력적인 분만 사고에 대한 국가 보상 한도를 기존 3000만원에서 최대 3억원으로 상향했다. 대한산부인과개원의사회는 “보상금을 10억원으로 상향하고, 의료 과실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마련해 ‘사법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