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에 사는 최모(32)씨 부부는 새벽에 15개월 된 아기가 경기를 일으켜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소아 전문의가 없어서 진료가 어렵다”는 설명을 들었다. 원래 이 아기는 평소에도 종종 경기 증상을 보여 이 병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 병원 응급실에선 새벽에 근무하는 소아 전문의가 없다는 이유로 ‘수용 곤란’ 통보를 한 것이다. 결국 이 부부는 아기를 데리고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 응급실을 찾아 한 시간 넘게 헤맸다.
소아·청소년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응급실을 찾아 헤매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가 늘고 있다. ‘응급실 뺑뺑이’ 문제는 국내 의료계의 고질적 문제점으로 지적돼 왔는데, 최근 들어 소아·청소년 환자의 ‘응급실 뺑뺑이’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9일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김미애 의원실(국민의힘)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제출받은 ‘권역별 소아 응급 진료’ 관련 자료에 따르면, 서울과 경기 지역의 응급실에서 ‘수용 곤란’을 이유로 소아·청소년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낸 회송 건수는 2020년 154건에서 지난해 620건으로 4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는 15세 미만 환자의 회송 건수만 집계한 것이다.
소아·청소년 환자의 응급실 뺑뺑이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은 당직을 서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소아·청소년과는 ‘기피과’라는 인식 속에서도 매년 조금씩이나마 전문의 수가 늘어 지난해 기준 6467명까지 됐으나, 올해(7월 기준)에는 이마저도 6438명으로 줄며 처음으로 감소세로 접어들었다. 의료계 내에선 “소아과는 당직을, 응급과는 소아를 싫어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종합병원에서조차 소아 전문의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인력이 귀한 상황에서 그나마 있는 소아과 전문의들은 당직을 서기 싫어하고,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은 까다로운 소아 환자 보기를 꺼린다는 뜻이다.
병원 관계자는 “아기가 경기를 일으켰을 때, 병원에서 놓아주는 주사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며 “하지만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주사 주입 후 아기에게 이상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 10%도 안 되는 확률 때문에, 혹시라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할까 봐 ‘소아 전문의가 없다’ ‘관련 검사 설비가 없다’며 다른 병원 응급실로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엔 동전을 삼킨 한 아이가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 시내 병원 응급실을 4시간 동안 전전하기도 했다. 아이 부모는 “내시경 장비가 없어요”라는 설명만 듣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찾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아이가 안전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의료계에선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소아 환자를 어렵게 생각한다는 걸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한 소아응급학과 전문의는 “보통 아이가 동전을 삼켰을 때는 식도에서 막히지 않으면 대부분 대변으로 나오기 때문에 X레이 촬영을 통해 식도에 걸렸는지 여부만 확인하면 된다”며 “이처럼 소아 환자를 기피하는 ‘폭탄 돌리기’ 문화가 있다 보니 소아응급 전문의를 꿈꾸던 의사들마저 마지막 폭탄의 희생양이 되기 싫어 수련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서울·경기만 해도 ‘뺑뺑이’를 돌 만한 응급실이라도 있지만 지방에선 그럴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통계에 잡히는 회송 건수는 그나마 의사가 접수라도 했다가 돌려보내는 것이지만 지방에선 간호사가 문 앞에서부터 막는다”며 “결국 발길을 돌리고 다른 지방으로 가는 환자들이 더 많다”고 했다. 실제 전국엔 411곳의 응급실이 있지만 소아전문응급센터는 12곳에 불과하다. 소아응급 전문의도 이곳에서 일하는 92명이 전부다. 그마저도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지역은 소아전문응급센터가 각각 2곳 이상이지만, 충북·전남 등에는 소아전문응급센터가 하나도 없다. 전국적으로 소아 응급 진료 건수는 2020년 76만3152건에서 2023년 129만951건으로 3년 사이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의료 인프라가 이를 쫓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김미애 의원은 “아이들이 아파서 응급실을 찾았는데도 의사가 없어 병원을 전전해야 하는 현실은 국가의 기본 책무 방기”라며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인력 확충과 지역 간 균형 배치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