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을 지낸 언어학자 김세중(65) 박사는 지난해 4월 딸 결혼식을 치르며 가까운 친척 10명과 친한 친구 10명에게만 결혼 사실을 알렸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있는 단체 채팅방 등에는 결혼 소식을 올리지 않았다. 김 박사는 “‘그동안 뿌린 축의금을 회수 못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들었지만, 내 연락을 받고 ‘축의금을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사람들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며 “남한테 폐를 끼치기 싫었고, 경제적으로 손해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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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축하한다는 의미지만, 어느새 ‘청구서’처럼 변한 축의금 문화에 조용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축의금이 주는 쪽과 받는 쪽, 양쪽 모두에게 부담인 상황에서 부모 세대로부터 대물림돼 온 ‘축의금 고리’를 끊는 것이다. 축의금 규모를 최소화하도록 정말 가까운 사이에만 결혼 소식을 알리는 경우도 있다.

21대 국회 비례대표를 지낸 김근태(35·국민의힘) 전 의원은 의원 신분이던 작년 2월 식을 올리지 않는 ‘노웨딩’으로 결혼했다. 가장 큰 이유는 축의금이었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은 “그동안 나도 축의금을 많이 냈지만, 국회의원이다 보니 축의금을 받는 결혼식을 하게 되면 갚아야 할 빚이 많이 생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축의금으로 결혼식 비용을 청구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런 마음의 짐을 안고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꼈다”며 “아내도 비슷한 생각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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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을 요청한 충남 지역의 한 군수(더불어민주당)는 작년 8월 가족과 소수 지인만 초대해 둘째 아들 결혼식을 치렀다. 종이 청첩장은 아예 만들지도 않았다. 소식을 들은 일부 군청 직원들이 군수실로 축의금을 들고 찾아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월급 통장으로 입금하거나, 비서에게 봉투를 두고 간 직원도 있었는데 전부 돌려줬다. 그는 “몇 년 전 첫째 아들 결혼 때는 소식을 알렸는데, 하객이 1000명 넘었고 너무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당시 어떤 이들은 봉투에 50만원, 100만원을 넣어 줬는데 그런 경우에는 꼭 명함이 동봉돼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부적절한 봉투는) 다 돌려드리긴 했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며 “가까운 사람 사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주고받는 건 몰라도,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부담을 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재준(60·민주당) 수원시장도 올해 3월 첫째 딸 결혼식을 조용히 치렀다. 주변에 결혼 관련 소식이 새나가지 않도록 당부하고, 직원들은 예식장 방문도 못하게 했다. 어쩌다 소식을 알게 된 몇몇 직원이 예식장으로 찾아왔지만 이 시장은 “가족 행사라 죄송하다”며 모두 돌려보냈다. 이 시장은 “정치적 혼란도 있었는데 결혼식을 시민이나 공직자들에게 알리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축의금 덜 받아도 떳떳하고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최호정(58·국민의힘) 서울시의회 의장은 시의원이던 2023년 2월 아들 결혼식을 식당에서 올렸다. 하객 100명이 모인 스몰 웨딩이었다. 결혼식 소식을 시의회와 서울시에 알리지 않았다. 평소 최 의장과 친분이 있던 서울시 직원 몇몇이 식장에 오겠다고 했지만 못 오게 했다. 최 의장은 “소식이 알려지면 지역구 주민들이 올 수도 있고, 허례허식이 될 것 같았다”며 “내가 낸 축의금은 아깝지 않다. (축의금 안 받아도) 열심히 일해서 월급 받고 산다”고 했다.

안일환(64) 전 청와대 경제수석도 2020년 5월 딸 결혼식을 조용하게 치렀다. 당시 그는 기획재정부 요직으로 꼽히는 예산실장을 거쳐 2차관에 임명된 직후였다. 기재부는 보통 경조사가 있을 때 내부망을 통해 공지하는데, 안 전 수석은 이를 하지 못하게 했다. 직원들은 축의금도 내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일부 직원이 비서에게 축의금 봉투를 주고 갔고, 안 전 수석은 이를 돌려줬다고 한다. 안 전 수석은 “당시 코로나도 확산하는 중이었던 데다, 직원들한테 축의금으로 부담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며 “(자랑으로)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사이버외대에서는 작년 연말 한 교수가 장지호 총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 온 교수의 손엔 청첩장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장 총장은 “당연히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청첩장을 열어봤더니 날짜와 이름 등만 있고, 정작 장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며 “‘이게 뭐냐’고 하니 ‘가족끼리만 조용히 식을 치르기로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장 총장이 “축의금 봉투라도 주겠다”고 했지만, 교수는 “마음은 감사하다”며 사양했다고 한다. 장 총장은 “이런 경우가 잘 없는데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며 “이 일로 우리 아들이 결혼할 때도 많이 알리지 않고 가족끼리만 식을 올려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고 했다. 장 총장은 “잘 모르는 사이에도 주고받는 축의금은 사실상 ‘상조회’의 개념인데 누군가는 한 번 끊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반면 공직자 등이 자녀 결혼을 부적절하게 알려 물의를 빚은 경우도 있었다.

이달 초 전남 순천소방서에선 ‘전남소방본부 비상 발령 동보 시스템’으로 고위 간부 자녀 결혼식 일정이 소방대원들에게 발송됐다. 이 시스템은 화재나 재난 등을 빠르게 전파하기 위한 것인데, 전파된 메시지에는 결혼식 날짜와 시간, 장소, 계좌번호 등이 적혀 있었다. 같은 날 나주소방서에서도 다른 간부의 자녀 결혼식 일정이 같은 시스템으로 발송됐다. 2023년 10월 경기도의 한 시의원은 아들 결혼식 청첩장을 직접 공무원들에게 돌려 비판을 받았다.

일부 기업에서는 강제로 축의금을 걷어 논란이 됐다. 한 제약회사에서는 직원 결혼식이 있으면 단체 축의금을 걷는다고 한다. 다른 부서이거나 일면식 없더라도 축의금을 내야 한다. 이 회사의 한 직원은 “축의금을 강제로 내는 셈인데 부끄러운 악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현행 청탁금지법은 공무원 등 법 적용 대상자에 대해 직무 관련성이 있으면 축의금은 5만원까지, 화환만 받으면 10만원짜리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직무 관련성이 없거나, 상사가 직원에게 주는 경우 등에는 제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