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서 네 살 아이를 키우는 주부 박모(43)씨는 아이가 약을 남길 때마다 처리 문제로 골치를 앓는다. 먹다 남은 약은 원래 따로 모아 버려야 하는데, 버릴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알약은 종량제 봉투에 넣어, 물약은 싱크대 하수구에 흘려 버리고 있다.
먹다 남은 약, ‘폐(廢)의약품’이 여전히 제대로 된 수거 절차 없이 버려지고 있다. 폐의약품은 생태계를 교란시킬 위험이 있는데, 정부가 적극적인 대책 마련에 손 놓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폐의약품은 함부로 버릴 경우 강이나 토양 등으로 흘러들어가 다양한 생태 독성을 일으킬 수 있다. 일부 의약품은 어류의 성(性)을 바꾸거나 기형의 원인이 된다. 항생제 성분이 물에 녹으면 항생제가 듣지 않는 ‘수퍼박테리아’를 양산할 수도 있다.
본지가 이달 들어 11일까지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 약국 10곳에 무작위로 전화해 “폐의약품을 버릴 수 있냐”고 문의한 결과, ‘버릴 수 있다’고 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서울의 한 약국은 “받지 않는다”고, 경기도 한 약국은 “그냥 일반 쓰레기로 버려라”고 했다. 경기도의 또 다른 약국은 “보건소나 주민센터에 버릴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인천 중구에 있는 한 약국의 경우, 정부 ‘공공데이터포털’ 사이트에는 ‘폐의약품 수거함이 있다’고 돼 있었지만 실제 전화하니 “저희는 안 받는다”고 했다.
환경부는 먹다 남은 약을 약국을 통해 버리는 제도를 지난 2008년 서울에서 시범 도입했다. 이후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 등과 함께 전국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현재는 흐지부지된 상태이고 참여하는 약국이 많지 않다.
지난 2021년 서울시 약사회는 서울시 측에 “더는 약국에서 폐의약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당초 지자체가 약국에 쌓인 폐의약품을 수거하기로 했었는데, 수거가 제때 이뤄지지 않다 보니 약국들이 점차 받지 않게 됐다”고 했다. 환경부 지침상 폐의약품은 따로 모아 소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지침이 ‘권고’ 수준이라 지자체 참여율은 저조하다.
폐의약품을 꼭 약국에만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보건소나 주민센터는 폐의약품 수거함을 운영한다. 다만 시민들 사이에선 “수거함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만도 적지 않게 나온다. 우정사업본부는 2023년부터 우체통에 물약을 제외한 폐의약품을 넣을 수 있게 하거나, 주민센터나 약국에 모인 폐의약품을 우체부들이 수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3월 말 현재 전국 229개 지자체 중 참여 지자체는 53곳에 그친다. 우체통에 폐의약품을 넣어도 되는 지자체도 48곳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