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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대학 병원 내과 교수 A씨는 본래 하루 4시간 정도 연구하며 논문을 썼다. 일주일이면 20시간을 연구에 집중한 셈이다. 그런데 작년 2월 의정 사태로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병원을 이탈한 후 A씨 연구는 완전히 멈췄다. 전공의들이 하던 야간 당직과 입원 환자 회진, 처방 등을 교수들이 도맡게 되면서 연구할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엔 연구, 교육, 진료에 1:1:1 비율로 시간을 썼는데, 지금은 모든 시간을 진료하는 데 쏟아붓고 있다“면서 ”연구를 못 하니 새 논문을 시작할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장기화되는 ‘의정 갈등’의 여파로 의학계 연구 실적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의학 기술 발전으로 저명 학술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는 실적이 매년 증가세였다. 그런데 의정 사태로 연구가 거의 실종되자 의학 발전 퇴행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9일 의료계에 따르면, 국내 의료계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대한의학회지(JKMS)’에 지난해 투고된 논문은 약 900편으로 전년(약 1220편) 대비 26% 줄었다. 같은 기간 대한의학회지에 게재된 논문도 408편에서 305편으로 25% 감소했다. 의사들이 제출하는 논문이 줄어들자 평가를 통과해 실제 실린 논문도 덩달아 줄어든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대한의학회 학술지 측은 “시간을 더 달라”며 교수들이 부탁하는 메일을 한 달에 10통 안팎씩 받고 있다. “요즘 병원에서 당직 서느라 미처 논문을 교정하지 못했습니다. 논문을 고칠 기간을 한 달 정도만 연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같은 내용이다. 보통 학술지 측이 논문 심사를 하다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저자에게 돌려보내 수정을 요청하는데, 교수들이 논문 고칠 시간이 없으니 시간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이다. 유진홍 대한의학회지 편집장(부천성모병원 감염내과)은 “의대 교수들이 책임감이 크고 자기 연구에 자부심도 걸려 있어 기존에는 절대 늦게 제출하지 않았다”면서 “원래 그러면 안 되지만, 최근 상황이 워낙 심각하니 기한을 늘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빅5′에 속하는 한 병원의 전체 의사가 쓴 SCIE급 논문 수는 2023년 1320편에서 작년 605편으로 반 토막 났다. SCIE급 논문은 미국의 학술 정보 분석 기업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선정하는 국제적 수준의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뜻한다.

흔히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로 불리는 필수 진료 과목의 연구 상황도 마찬가지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지에 국내 저자들이 투고한 논문은 2023년 73건에서 2024년 47건으로 35.6%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전체 투고 논문 중 국내 저자 논문이 차지하는 비율도 28.9%에서 16.2%로 줄었다. 국내 의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에 논문을 보내는 외국 의사가 점점 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의사들의 투고가 줄자 이제 외국인 저자가 10명 중 8명에 달하는 것이다.

대한산부인과학회지 논문 투고 건수도 외국 학자들의 활발한 참여로 2023년 296편에서 지난해 347편으로 17% 늘었다. 같은 기간 국내 저자 비율은 13.9%(41편)에서 9.8%(34편) 줄었다. 대한외과학회지 역시 같은 기간 국내 저자 투고율이 45.4%에서 36.9%까지 떨어졌다. 김덕우 대한외과학회지 편집장(분당서울대병원 대장항문외과)은 “국내 외과 계열의 유일한 SCIE급 학술지가 우리 외과학회지이기 때문에, 다른 국내 학회지 피해가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의학 논문 감소 현상은 올해 더 심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영주 대한산부인과학회지 편집장(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은 “논문 하나를 쓰는 데 1년에서 1년 반 정도 걸리기 때문에 작년에 연구를 못 한 여파가 올해 중반쯤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유진홍 대한의학회지 편집장은 “의학 연구의 쇠퇴는 일반 국민이 당장 실감하지 못하지만, 연구가 몇 년씩 멈추는 것은 장기적으로 의학계뿐 아니라 이공계 전체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면서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의정 갈등이 하루빨리 정상화돼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