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 주치의인 김경모 소아소화기영양과 교수(왼쪽 두 번째) 등 의료진이 생후 15개월이던 이지원씨의 퇴원을 축하해주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30년 전 간이 딱딱하게 굳는 선천병으로 첫돌을 맞기도 전에 죽음의 문턱에 놓였던 아기가 아버지의 간 일부를 이식받고 건강을 되찾아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국내 최초 생체 간이식 주인공 이지원(30)씨의 이야기다.

16일 서울아산병원에 따르면 선천성 담도 폐쇄증에 따른 간경화를 앓던 이씨는 1994년 12월 8일 아버지의 간 4분의 1을 이식받은 뒤 기적같이 건강을 되찾았다.

살아있는 사람의 간 일부를 이식하는 생체 간이식은 환자 입장에서는 뇌사자 장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뇌사 과정에서 간이 손상되는 위험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뇌사자 간이식에 비해 수술이 매우 까다롭고 합병증 발생 위험이 커 높은 생존율을 담보하기 어렵다.

이씨의 수술을 집도한 이승규 간이식‧간담도외과 석좌교수는 당시 동물실험과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치며 첫 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선천성 질환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9개월 아기를 살리겠다는 마음만으로 이 교수를 비롯한 의료진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체 간 이식 도전에 나섰다. 이씨의 부모도 의료진의 용기에 부응해 딸에게 간을 내줬다.

의료진은 당시를 또렷이 기억했다. 의료진은 “모두가 숨죽이며 혈류를 개통한 순간, 뱃속에 이식된 창백한 간이 붉게 물들었다”며 “아기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무사히 간으로 흘러들었다. 국내 첫 생체 간이식이 성공한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시한부의 삶을 살던 이씨에게 기적 같은 희망이 찾아왔고, 이씨는 올해 건강하게 서른살을 맞이했다. 이씨는 현재 보험 관련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첫 생체 간이식 주인공인 이지원씨가 당시 집도의였던 이승규 간이식·간담도외과 교수(왼쪽)와 주치의인 김경모 소아소화기영양과 교수와 함께 30주년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이씨 사례의 성공을 계기로 서울아산병원은 지금까지 성인 7032명, 소아 360명에게 생체 간이식으로 새 삶을 선사했다. 이는 국내를 넘어 세계 최다 기록이다.

뇌사자 장기기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국내 현실에서 이렇게 많은 수술을 집도할 수 있었던 건 새로운 수술법을 도입한 덕분이었다. 이 교수는 2000년 3월 세계 최초로 2대1 생체 간이식을 시행했다. 기증자 2명으로부터 간 일부를 받아 수혜자에게 이식하는 방법으로, 한 사람의 생체 기증자로는 부족한 경우에도 간이식이 가능해졌다. 그동안 638명의 환자가 이 수술법으로 새 삶을 얻었다.

또한, 수혜자와 기증자의 혈액형이 다른 경우의 간이식 수술도 시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1042명의 환자가 혈액형 부적합 간이식을 받았는데,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횟수라고 서울아산병원은 설명했다.

그럼에도 서울아산병원의 간이식 환자 생존율은 1년 98%, 3년 90%, 10년 89%로 매우 높다. 최근 10년간 시행한 소아 생체 간이식 생존율은 거의 100%에 육박한다.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생체 간이식을 받은 소아 환자 93명은 1년 100%, 5년 98.6%의 생존율을 보였다.

서울아산병원은 높은 생존율을 기록한 배경으로 수술 전후의 고도화된 협진 및 집중관리 시스템을 꼽았다. 소아 환자의 경우 성장과 발달 과정에 있기 때문에 빈번한 영양실조로 인한 문제, 성장 및 발달 지연 문제, 예방접종과 다양한 감염 노출 등 일반 환자에 비해 특수한 어려움이 있다. 이에 따라 소아에 대해 잘 아는 소아소화기영양과 의사가 포함된 전문가팀이 협진을 통해 환자가 사회에 복귀한 후에도 지속적인 관리를 받아 생존율을 높이도록 하고 있다.

1998년 당시 유치원생이던 이지원씨가 집도의였던 이승규 교수와 함께 공원에서 청진기를 들고 장난을 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이 교수는 “1994년 생후 9개월이었던 이씨를 살린 생체 간이식은 우리의 간이식 여정에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되어주었고, 이를 계기로 7000명 넘는 말기 간질환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선사할 수 있었다”며 “이러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절체절명의 환자를 살리고자 하는 도전 정신과 열정으로 뭉친 간이식팀 의료진과 수술 이후 눈부신 생명력을 보이며 일상을 살아가는 환자들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간 이식 후 30년간 이씨의 영양 관리 등 주치의를 맡아온 김경모 소아소화기영양과 교수는 “30년의 시간은 의료진의 헌신과 노력의 결실일 뿐 아니라 의료진을 신뢰하며 잘 따라와 준 이식 환자들과 가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의 성과이기도 하다”며 “국내 첫 생체 간이식을 받은 아기가 기적처럼 유치원에 입학하고, 이후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이제는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성인으로 성장한 건 이식 의료 성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했다. 이어 “이식 후 관리를 철저히 한다면 30년을 넘어 평생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며 “이씨처럼 간이식을 받은 환자들이 성공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건 앞으로 이식받을 아이들과 가족에게 큰 희망을 주는 귀중한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