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형병원 진료실 문에 의료진의 동의 없는 녹음을 삼가달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독자 제공

‘진료실 내 녹음·녹화 금지.’

9일 오후 서울의 한 대학병원 외래 진료실 출입문 곳곳에 이런 내용의 A4용지가 수십 장 붙어 있었다. 서울 ‘빅5(상위 5대) 병원’의 한 산과(産科) 교수는 “최근 한 고위험 임신부에게 출산 중 사고 가능성이 10% 안팎이라는 의학적 통계를 고지했는데, 그때부터 남편이 진료 때마다 녹음을 하더라”며 “상호 신뢰가 쌓인 상황에서 의사가 소신 진료를 해야 환자 예후가 좋은데, 녹음은 불신을 키운다”고 했다.

환자 생명을 다루는 필수 진료과 의사들은 “환자의 진료 녹음이 일상화 됐다”, “환자가 휴대폰만 만져도 녹음하나 싶어 가슴이 철렁한다”고 했다. 최근 소아과·산부인과·응급의학과 등 필수과의 의료 사고 배상액이 10억원이 넘는 판결이 속속 나오면서 의사들의 ‘녹음 노이로제(신경쇠약)’도 심해지고 있다.

의사들은 환자의 ‘진료 중 녹음’ 상당수가 소송 대비용이라고 본다. 서울 대형 병원의 한 응급실 전문의는 “환자 상태를 설명하면 보호자들이 휴대전화를 마이크처럼 꺼내드는 경우가 잦은데, 솔직히 기운이 빠진다”며 “어떤 환자들은 이 녹취록 일부를 발췌해서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았다’며 정부와 병원에 민원을 낸다”고 했다.

마상혁 창원파티마병원 소아과장은 “검사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는 보호자도 있다”며 “일부 환자는 소아과 의사의 설명을 녹음했다가 앞뒤 자르고 일부만 맘카페에 올려 ‘저 소아과에 가지 말라’고 공격하기도 한다”고 했다. 경기도 고양의 한 소아과 의사는 “의사의 문제만 부각하는 ‘악마의 편집’이 걱정돼, 부모가 녹음을 하는 것 같으면 저도 몰래 ‘맞녹음’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환자나 보호자가 의사와의 대화를 녹음해도 형사 처벌은 어렵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 견해다. 제3자의 대화를 몰래 녹음했다면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지만, 대화 당사자인 환자가 한 몰래 녹음에 대해선 규제 법령이 없다.

의료계 인사들은 “진료실 녹음은 장기적으로 환자에게 그 피해가 돌아간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서울아산병원의 한 교수는 “요즘은 제 판단을 말하려고 하면 보호자들은 휴대전화로 녹음부터 하려는 경우가 있다”며 “이리 되니 응급 시술을 하면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환자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방어 진료를 하게 된다”고 했다.

세브란스병원의 한 교수는 “물증을 남겨 시비를 정확히 가리려는 젊은층은 학창 시절부터 녹음에 익숙해져 있다”며 “문화가 변했다”고 했다.

다른 목적의 녹음도 있다. 이모씨의 발달장애 아들은 3년 넘게 기다린 끝에 빅5 한 병원의 소아정신과 A 교수에게서 초진을 받았다. 지금은 1~2개월에 한 번씩 외래 진료를 간다. 이씨는 그때마다 A 교수의 말을 휴대전화로 녹음한다. 그는 “이 분야 권위자인 교수님의 외래 진료 시간은 5분도 안 된다”며 “교수님의 지시 사항을 토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녹음을 한 뒤 반복해서 듣는다”고 했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진료실에 사전 동의 없는 녹음, 녹화를 불허한다는 팻말이 붙어 있다. /독자 제공

김민 강남세브란스병원 안과 교수는 본지에 “녹음을 하시는 환자들이 은근히 많지만 모른척 하는 편”이라며 “환자들이 제 설명을 다 기억하기 어렵기 때문에 녹음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국내에서 안종양 치료 경험이 가장 많은 의사다.

일부 환자단체에선 “의료계가 자초한 면도 있다”는 말도 나온다. 서울과 지방의 성형외과 의료진이 마취 상태에 있던 여성을 성추행 하거나 성희롱한 사건 등이 끊이지 않자, 불안을 느낀 환자들이 자구책의 하나로 녹음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