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방역 완화로 마스크 착용 의무 등이 풀리면서 호흡기 감염병들이 동시에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각종 호흡기 감염병들의 검출률이 1년 전보다 2~3배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바이러스가 대화나 기침할 때 분출되는 비말(침방울)을 타고 여과 없이 상대 코점막 등으로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질병관리청의 4월 첫째 주 ‘급성 호흡기 바이러스 검출 현황’에 따르면, 호흡기 환자(390명) 중 바이러스가 검출된 사람은 276명(70.8%)이었다. 전주에 비해 검출률이 6.4%포인트 증가했다. 호흡기 감염증 환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뜻이다.
또 검출된 9개 호흡기 바이러스 중 가장 적게 검출된 것이 코로나(3.3%)였다. 다른 호흡기 바이러스 감염자 수가 코로나 감염자 수를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는 수치다. 가장 많이 검출된 것은 리노 바이러스(19%)였다. 보통 ‘감기에 걸렸다’라고 할 때 이 바이러스가 원인인 경우가 가장 많다. 콧물, 기침 등 증상을 보이는데 별다른 치료 없이도 며칠 지나면 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영·유아의 경우 폐렴으로 악화할 수 있다. 4~5월과 9월에 많이 유행한다. 코로나 기간엔 발병률이 예년의 절반 정도로 떨어졌다고 한다.
바이러스 검출률은 질병청이 호흡기 감염병 추세 파악을 위해 전국 77개 의원에서 호흡기 검사 결과를 주기적으로 받아 종합한 결과다. 질병청 관계자는 “표본이 적기 때문에 리노 바이러스의 검출률이 코로나의 5.7배라고 해서 발생 환자 수도 코로나의 5.7배라고 말하긴 어렵다”며 “다만 리노 바이러스 환자가 코로나 환자보다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볼 수는 있다”고 했다.
둘째로 많이 검출된 바이러스는 호흡기 세포 융합 바이러스(RSV)로 13.3%를 차지했다. 이 감염증은 어린아이들을 둔 부모들 사이에선 ‘공포의 바이러스’로 불리기도 한다. 송경호 분당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기침·고열 등을 동반하는 이 바이러스는 특히 영·유아에게 폐렴이나 모세기관지염을 일으킬 수 있어 위험하다”고 했다. 선천성 심장 질환 등 고위험군은 이 감염증 예방을 위해 면역 글로불린(항체)을 주사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검출률은 작년 3월엔 4.8%였다가 1년 만에 2배 넘게 증가했다.
그다음은 파라인플루엔자 바이러스(10%)와 아데노 바이러스(9%) 순이었다. 둘 모두 1년 전에 비해 검출률이 3배 이상 증가했다. 파라인플루엔자는 늦봄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흔히 ‘여름 감기’로 불린다. 기침, 발열 등 일반적인 감기 증세를 보이고 소아에게 자주 발생하는 후두염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 알려져있다. 인플루엔자(독감)보다는 경증인 경우가 많다.
아데노 바이러스는 고열과 인후통을 유발한다. 눈이 가렵고 충혈되거나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한다. 심하면 폐렴으로 악화한다. 기저귀 접촉 등으로 옮을 정도로 전염성이 높은 편이다. 수영장 물로 전염된 사례도 있다. 어린이집이나 학교, 기숙사 등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집단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5.4%), 보카 바이러스(4.1%), 메타뉴모 바이러스(4.1%)도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많이 검출된 바이러스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흔히 말하는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다. 코로나 방역 완화와 3월 개학 등이 겹치면서 올해 봄철 독감 환자는 평년보다 3배쯤 늘었다. 심하면 항바이러스제(타미플루 등)를 처방받는 게 좋다.
호흡기 질환은 아니지만 비말로 전파되는 엔테로 바이러스도 유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이 바이러스는 손발에 물집이 생기고 고열이 나는 수족구병과 입안에 물집이 생겨 음식물을 삼킬 때 통증을 유발하는 구내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다. 영·유아에게 자주 나타난다. 백신은 없다.
보카 바이러스와 메타뉴모 바이러스는 주로 영·유아가 감염된다. 발열과 가래, 쌕쌕거림 증세가 나타나고 폐렴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코로나, 독감 외의 호흡기 바이러스는 백신이 없어 증상에 따라 해열제, 항생제 등을 처방받아 복용해야 한다. 정지원 서울아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사람 많은 곳이나 실내에선 최대한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자주 씻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마상혁 창원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장은 “바이러스 감염병의 동시다발적 유행은 ‘면역 빚(immune debt)’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며 “사람들이 그동안 조금씩 감염됐다면 이런 폭발적인 환자 발생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면역 빚’ 현상이란 사람 간 접촉을 막은 코로나 방역으로 바이러스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갑자기 여러 바이러스와 접촉하자 감염이 더 쉽게 되는 걸 말한다. 반면 다른 전문가들은 “바이러스가 중증으로 악화하는 걸 막는 기본적인 면역은 코로나 때도 갖춰져 있었다”며 “과거부터 있었던 바이러스들이 코로나 방역이 풀리면서 이전의 유행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마스크 착용과 관련은 없지만 방역 완화로 외부 활동이 늘면 쥐를 통해 전파되는 유행성출혈열, 진드기를 통해 옮는 중증 열성 혈소판 감소 증후군(SFPS)도 유행할 수 있다고 했다. 유행성출혈열은 백신이 있지만, 중증 열성 혈소판 감소 증후군은 치사율이 12% 이상인데도 백신이 없다.
☞면역 빚(immune debt)
방역 기간 외부 활동 감소로 바이러스 접촉 자체가 줄면서 면역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방역 해제 후 감염병에 더 잘 걸린다는 개념.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 호흡기 감염병 증가를 ‘면역 빚’으로 설명한다. 반면 방역 기간이라도 면역력 자체가 약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전 바이러스 유행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