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전광판 - 지난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강남차여성병원의 제왕절개 수술 현황을 알리는 전광판. 산모 대부분이 35세를 넘고 40세를 넘는 산모도 세 명 보인다. 통계청 자료를 분석하니 작년 아이를 낳은 여성 셋 중 한 명(33.8%)이 35세 이상 고령 산모로 나타났다. /장련성 기자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강남차여성병원. 이날 제왕절개 수술을 받는 산모 10명 이름과 나이가 전광판에 주르륵 떴다. 그런데 외국인(30) 한 명을 제외하고는 산모 나이가 모두 40대 전후였다. 가장 고령은 43세. 병원 측은 “이제 ‘불혹(不惑) 출산’은 드물지 않은 현상”이라고 했다.

본지가 통계청 출산 통계를 분석해 보니 35세 이상에 아이를 낳는 고령 산모가 2020년(잠정치) 전체 산모의 셋 중 한 명(33.8%)인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엔 2.5%로, 30년 만에 13배 이상으로 뛰었다. ‘늦둥이 엄마'는 2000년 6.8%, 2010년 17.1% 등 가파르게 치솟다 2018년 처음 30%대에 진입했다.

예전엔 늦둥이들은 둘째나 셋째 이후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선 결혼과 출산을 미루면서 한 명 낳는 아이까지 늦둥이인 경우가 적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첫째 아이의 평균 출산 연령(32.2세)은 2010년(30.1세) 대비 두 살 넘게 많아졌다. “환갑 나이에 자식들 대학 보내느라 허리 휘어질 판” “‘실버 파산'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이상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청년들 인생 사이클이 크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라며 “저출산, 고령화도 문제지만 늦둥이 출산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환갑 넘어도 자녀 대학 뒷바라지… 한국인 ‘인생 사이클’ 바뀐다

“20대 산모면 ‘엄청 젊은 엄마’지요. 며칠 전에도 산모 15명을 진료했는데 35세 아래는 딱 두 분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 이상이더라고요. 40대도 3명이나 되고…”

서울 강서구 미즈메디병원 조주형 산부인과 주임과장이 지난 27일 진료 기록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 낳는 산모 연령대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자녀를 언제, 얼마나 낳느냐에 따라 인생 설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인생 사이클’이 고령 출산으로 격변하고 있는 것이다.

◇OECD 최고령 출산 국가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가 ‘1·2·3 운동’을 벌인 게 2005년이다. 20대에 결혼해서 ‘1’년 내 임신하고, ‘2’명 자녀를, ‘3’0세 이전에 낳아 건강하게 잘 기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30세 이전에 아이 2명'이란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출산은커녕 초혼 연령이 남성 33.2세, 여성 30.8세로 양쪽 다 30세를 넘어간 상태다. 정재훈 서울여대 교수는 “요즘 세대는 그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결혼·출산 적령기’나 ‘생애 주기’를 거부하고 전체 자기 인생 계획 속에 결혼·출산을 하나의 부속 요소로 두기 때문에 언제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여성들은 20대 후반(25~29세)에 아이를 가장 많이 낳았다. ①전체 산모 가운데 25~29세 비율이 42.0%로 가장 많았고, ②30~34세 39.2% ③35~39세 8.3% 순이었다. 20대 후반 여성이 30대 후반보다 5배쯤 아이를 많이 낳았다. 10년 전인 2010년만 해도 20대 후반이 곱절 많았다.

그래픽=김현국

양상이 반전된 것은 2016년이다. 35~39세(23.2%)가 25~29세(20.9%) 출산을 앞지르더니 작년(잠정치)엔 전체 산모의 28.8%가 30대 후반으로 20대 후반(18.6%)의 1.5배였다. 이렇다 보니 국내 주요 산부인과 병원에선 35세 이상 고령 산모가 절반을 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박중신 서울대병원 교수팀(산부인과)이 2016~2020년 산모 총 6378명을 조사했더니 51.6%가 고령 산모였고, 이 중 9.2%는 40세 이상이었다. 미즈메디병원도 같은 기간 산모 1만3144명 가운데 38.1%가 35세 이상, 5.1%는 40세 이상이었다.

여성들의 출산 연령이 높아지는 현상은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가파르게 출산 연령이 치솟는 나라가 한국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가정 통계에 따르면, OECD 주요국 가운데 우리는 2017년 현재 가장 고령(평균 32.6세)에 아이를 낳고 있고, 1995~2017년 22년간 평균 출산 연령도 4.7세 상승해 비교 가능한 OECD 국가 중 가장 속도가 빨랐다. 우리나라 여성의 1인당 합계출산율은 작년 기준 0.84명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적다. 65세 이상 고령화 속도 역시 가장 빠른 나라에 속한다. 여기에 이어 이제는 ‘고령 출산’ 문제까지 추가된 것이다.

◇'실버 파산' 걱정까지 나와

이 같은 추세가 장기화하면 궁극적으론 부모·자녀 세대 모두 나중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구체적으로 ‘청년 빈곤’ ‘실버 파산’이 거론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계속되는 저출산·고령화 현상으로 경제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2042년쯤엔 부모 세대의 노후 생활 기반인 국민연금 기금도 적자를 내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20년 뒤엔 “연금 못 받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녀 한 명당 대학을 마치기 위한 교육비가 4억원(NH 투자증권 100세 시대연구소)에 이른다. 우리는 북유럽 국가 수준의 사회보장은 안 돼 있는데, 당장 노후 준비도 충분히 안 된 상태에서 자녀 뒷바라지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고다. 환갑 즈음에 대학 다니는 아이를 두게 되는 고령 출산 부모들이 이런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고 결국 빈곤층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삼식 한양대 고령사회연구원장은 “아동·교육수당으로 자녀 키우기 쉽고, 사회 안전망까지 충분한 나라들과 달리 우리는 자녀 교육비 지출이 클 때 은퇴하면 부모·자녀 세대 모두 곤란해진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자녀를 늦게 낳는 데다, 둘째까지 낳으라고 할 경우 ‘노후 지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