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문에 가족들이 ‘헌혈도 자제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걱정하더라고요. 그런데 설날이라고 모여서 밥먹고 술마시는 것보단 헌혈이 훨씬 안전하고 의미있는 일 아닐까요?”

설 연휴를 하루 앞둔 10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헌혈의집 서울역센터에서 만난 대학생 나모(23)씨는 “코로나 때문에 헌혈하는 사람이 줄어 안타깝다”며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고향 방문 자제령’까지 내려온 올해 설, 나씨 가족도 부산 친가 방문을 포기하고 서울 용산 자택에서 조용한 명절을 보내기로 했다. 대신 나씨가 택한 건 헌혈의집 방문과 17번째 헌혈이다.

10일 서울 중구 한강대로 서울역 광장 헌혈의 집에서 시민들이 헌혈하고 있다. 적십자사는 원활한 혈액 수급을 위해 설 연휴 중 13~14일 헌혈의 집 70~80%를 정상 운영할 계획이다. /김연정 객원기자

이날 헌혈의집 서울역센터는 설 명절을 이웃 사랑으로 시작하려는 사람들로 조용히 붐볐다. 서울역 광장 한편, 그나마도 임시 선별진료소에 가린 곳에 위치한 작은 센터이지만 오후 3시까지 시민 16명이 이곳을 찾아 귀성 열차 대신 헌혈대에 올랐다. 건설 현장직으로 일하는 이모(46)씨도 “새해를 헌혈로 시작하면 뿌듯하고 좋을 것 같아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씨도 헌혈 경력 31번의 ‘베테랑'이다. 류금영 헌혈의집 서울역센터 책임간호사는 “거리두기 2.5단계가 오래 지속되면서 서울 번화가 센터는 방문객이 줄어 고생하고 있다”며 “큰 명절을 앞둔 바쁜 시기에 잊지 않고 헌혈을 하러 와준 시민들께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피가 마르던 헌혈의집에도 민족 대명절의 온기가 찾아왔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10일(0시 기준) 국내 혈액 보유량은 4.9일분으로 적정 보유량(5일분)에 근접했다. 연초부터 지난 9일까지 집계된 전국 헌혈자 숫자는 26만5451명. 작년 같은 시기보다 오히려 1만여명 늘었다.

특히 이번 주부턴 설 명절에 의미있는 추억을 남기려는 시민들 선의가 줄을 이었다. 헌혈의집 구로디지털단지센터엔 10일 오후 5시까지 60명 넘는 헌혈자가 찾아왔다. 평일 기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시행 이후 가장 많다. 김연량 구로디지털단지센터장은 “이번 주 월요일부터 하루 50~60명대를 유지하고 있다”며 “설 연휴 동안 고향 대신 헌혈의집을 찾겠다는 문의 전화도 많이 걸려온다”고 했다.

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는 코로나 확산으로 2020년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코로나 확산세로 거리두기 단계가 상향 조정될 때마다 헌혈자들 발길이 뚝뚝 끊겼다. 전체 헌혈자의 30%가량을 차지하던 기업·학교·군대 등 단체 헌혈 행사도 줄줄이 취소됐다. 그 결과 지난 한 해 월평균 혈액 보유량은 7월(5.9일) 한 달을 제외하곤 단 한 차례도 적정 보유량(5일) 기준을 넘기지 못했다. 코로나 3차 대유행이 본격화된 연말은 최대 고비였다. 10월부터 12월까지 월평균 혈액 보유량은 4.0일분, 3.9일분, 3.7일분으로 계속 줄었다. 혈액수급 위기 단계에서 혈액 보유량 3일분 미만은 ‘주의’ 단계에 해당하는데, 이땐 긴급한 경우를 제외하면 혈액 공급이 어려워진다. 혈액 보유량이 2.7일분으로 떨어진 지난 12월 18일엔 보건복지부가 직접 헌혈 동참을 호소하는 대국민 안전안내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올해 들어 조금씩 혈액 보유량이 적정 수준으로 회복되고 있지만, 현장에선 “혈액 부족 문제의 불씨가 여전하다”고 우려한다. 헌혈자 증가가 ‘새해 반짝 현상’에 그칠 경우 작년과 같은 혈액 부족 사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당장 연휴 기간 혈액 수급도 걱정거리다. 헌혈의집 운영이 일부 중단되고, 방문자 숫자가 감소할 경우 일부 병원에서 긴급 수혈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어서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는 원활한 혈액 수급을 위해 연휴기간에도 일부 헌혈의집을 운영한다. 10일엔 전국 헌혈의집 11곳이, 13일과 14일엔 각각 62곳, 90곳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