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가 신랑 측에 예단을 보내는 건 여성의 지위가 낮던 시절의 구습이지만, 부동산 폭등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뉴시스

예비신랑 A씨는 요즘 끙끙 앓고 있다. 결혼 준비 막바지에 불거진 예단(禮緞) 갈등 때문이다. 신혼집은 A씨 부모가 일찌감치 마련해둔 서울의 24억짜리 아파트. 인테리어와 혼수는 예비신부 측이 부담했다. 이들은 양가에서 각각 1억5000만원씩 현금 증여도 받았다.

그런데 돌연 A씨 어머니가 “아무리 기다려도 사돈 댁에서 말이 없으니 서운하다”며 “현금 예단을 받아야겠다”고 했다. 거액의 집을 해준 만큼 상대도 ‘최소한의 성의 표시’를 하라는 것이다.

신부는 반발했다. “결혼이 금전 거래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도 할 만큼 했다”면서 “아파트는 당신 명의지만, 예단비는 공중에 흩어지는 돈”이라고 했다. 신부는 혼인이 파탄 날 경우 예단비는 선물이라 돌려받지 못한다는 판례까지 들었다. 이 와중에 서로 “염치가 없다” “욕심이 많다”는 말이 나오면서 파혼까지 거론됐다고 한다.

한국 결혼의 대표적 허례허식으로 꼽혀온 예단이 여전히 결혼의 뇌관이 되고 있다. 관련 업계 등에 따르면 예비부부들이 “예단,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 하기로 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기본은 해야 한다’며 하나둘 챙기다 보니 수천만원” “양가 갈등을 어떻게 풀까” 고민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예단은 집이나 결혼식 같은 필수 항목이 아니라, 관습과 체면, 관계의 역학에 좌우되는 ‘눈치의 영역’. 합의가 쉽지 않아 감정의 앙금으로 남기 십상이다.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열린 전통혼례 시연행사. 예단은 신부 측이 신랑 측에 "가족으로 받아줘 고맙다""잘 봐달라"는 의미의 선물이다. 전통이란 이름이지만 젊은 여성들은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뉴스1

예단은 ‘예의를 갖춰 보내는 비단’으로, 신부 측이 시댁에 “가족으로 받아줘 감사하다, 잘 봐달라”는 뜻으로 건네는 선물을 통칭한다. 경제력 없는 여성이 남성에 의탁해 살던 시대의 유물로, 지금은 간소화됐다. 이불·반상기·은수저 등 현물 예단과 폐백·이바지는 없어지는 추세고, 수백만원 정도의 현금이나 가전·화장품·상품권·여행 같은 실용적인 선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상류층에선 여전히 2000만~1억5000만원의 현금 예단이 오가며 결혼 비용 거품을 키우고 있다”는 게 업계 전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집값 폭등이다. 집값이 지금보다 싸던 과거엔 ‘남자가 단칸방을 얻고 여자가 살림을 채운다’ ‘여자는 예물을, 남자는 예단을 받는다’는 공식으로 비용의 균형이 얼추 맞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예단은 예물이 아닌 집값에 묶이는 항목으로, 양측이 부담한 돈의 차액 또는 집값의 10~30%를 보전해주는 수단이 됐다. 평균적으로 주택 마련에서 남성의 부담금이 두 배쯤 많기 때문에, 여성이 상징적인 금액을 보내면서 예단 문화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서울 중구 남산에서 바라본 성동구와 광진구 등 한강벨트 인근 아파트 대단지. 한강벨트 등 역세권 부동산값 폭등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근원으로 지목되기도 한다./뉴시스

유명 결혼정보업체 관계자는 “예단은 집값뿐만 아니라 학벌과 연봉, 직업 안정성, 집안의 위세 등을 따져 처지는 쪽이 격차를 메워주는 식으로 계산되는데, 여전히 여성의 지위를 얕보는 시선이 전제돼 있다”며 “남녀평등 속에 자란 신부들은 예단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 신부 부모가 몰래 보내기도 한다”고 전했다.

시어머니인 50대 주부 B씨는 “아들 내외가 미국에서 만나 결혼하기에 예단을 사양하고 ‘내가 악습을 끊었다’고 뿌듯해했는데, 정작 우리 집안 어른들이 ‘며느리를 보는 너라도 옷과 이불을 돌려야 한다’고 종용하셔서 내 돈으로 충당했다”고 말했다.

남녀가 똑같이 비용을 내는 ‘반반 결혼’, 여성의 재력이 더 큰 경우가 늘면서 예단 갈등도 커지고 있다. 예비신부인 공무원 C씨는 “내가 14억짜리 집을 해가니 친정 부모님은 당연히 예단 받을 생각을 하시는데, 되레 신랑 쪽에선 ‘우리 집엔 예단은 안 해도 된다’고 선심 쓰듯 말한다. 양쪽에 말도 못하고 미치겠다”고 했다.

5년 전 사내 결혼을 한 대기업 여직원 D씨는 “집을 포함해 모든 비용을 똑같이 부담했는데도 ‘갖출 건 갖춰야 한다’는 시댁 요구로 예단비 3000만원을 드렸다”며 “억지로 끌려들어 간 게 아직도 억울하다”고 했다.

서구 선진국에서 결혼은 철저히 당사자들의 문제로, 부모의 입김이나 계산이 한국처럼 크게 미치지 않는다. 지난해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웨딩 박람회.(사진은 기사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뉴스1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집값 때문에 이혼하는 사람은 없어도 예단 때문에 이혼하는 경우는 많이 봤다”며 “액수를 떠나 ‘배려받지 못했다’는 감정을 자극하면 돌이킬 수 없다”고 했다.

이웅진 선우 대표는 “선진국에선 결혼은 당사자끼리 해결할 문제이자 진정한 독립의 시작”이라며 “한국도 초저출산 세대가 결혼 연령에 도달하는 10~15년 뒤면 예단 문화는 없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