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 봉래산 기슭에 있던 초등학교 담장 너머에는 낮은 나무와 풀들이 자랐다. 봄이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동네 할머니들이 굽은 허리를 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어린 쑥을 땄다. 옆에는 바구니 가득히 쑥이 쌓였고 담 너머로 고개를 내민 아이들이 “할머니!” 하고 목청 높여 부르기도 했다. 자동차가 기어를 여러 번 바꾸며 올라와야 하는 언덕을 거꾸로 내려갈 때면 우리는 속도를 최대한 올려 달렸다. 타다닥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뛰기 시작하면 동네 아줌마들이 여기저기서 “뛰지 마라”고 소리쳤다. 작은 떡볶이 가게도, 설탕을 녹이며 국자를 태우고 있는 친구들도 지나쳤다.
집 문을 열면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어머니가 좁은 주방에 서 있었다. 매콤한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빨간 국수를 비비고 있었다. 곧 나와 동생은 고개를 숙이고 국수를 먹었다. “매워”라고 외치며 물을 몇 컵이나 마셨다. 아버지는 큰 대접에 담긴 국수를, 강물을 삼키듯이 단숨에 먹었다.
부모님은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고추장과 고추, 생마늘이 늘 상에 올라왔다. 비빔국수를 할 때도 초록 고추를 어슷 썰어 넣었다. 고춧가루와 간장·식초로 양념을 하고 익은 김치를 썰어 넣은 비빔국수를 먹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혀가 불타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가 한 음식을 먹을 일이 줄어들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로는 그 기회가 아예 없어졌다.
북가좌동의 높은 언덕은 영도 산복도로 같았다. 그 길을 타고 내려오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잔치국수 우동’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해 밤늦게 문을 닫는 이곳의 정식 이름은 ‘유진분식’이다. 30년 가까이 국수를 끓인 이 집에 저녁이 한참 지나 들어섰다.
식당에는 이미 술을 한잔 걸친 것 같은 중년 남녀가 마주 앉아서 고개를 맞대고 국수를 먹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이문세의 노래가 들렸다.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이라는 가사가 들렸고 나는 제목을 바로 기억해 내지 못했다. 가게를 혼자 맡고 있는 주인장은 풍성한 파마머리를 하고 피부가 맨들거렸다. 국수를 넣고 끓이다가 노래가 후렴구를 지나 끝이 날 즈음 국수를 건져 찬물에 씻었다. 국수를 건져낸 솥에는 물을 큰 국자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다음에는 디제이의 음성이었던가, 아니면 라디오 드라마였던가, 사람의 목소리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단무지와 김치가 나도 모르는 새 깔렸다. 고춧가루를 많이 쓰지 않고 신맛이 반쯤 올라온 김치 맛에 비빔국수 맛이 조금은 짐작됐다. 연한 갈색 빛을 띤 국물에 국수가 한 움큼 담겨 나왔다. 먼저 국물을 마셨다. 멸치와 채소에서 비롯된 단맛과 구수한 향기가 혀와 비강을 통해 몸에 스며들었다. 그 뒤로 매콤한 맛이 길게 뒤를 이었다. 멸치의 비율을 높여서 강한 맛을 뽑기보다 부드럽고 아늑한 봄바람 같은 육수였다. 매끄러운 면은 홀로 두면 저절로 꿈틀거릴 것처럼 생기가 있었다. 단단하고 찰기 있는 면 수십 가닥을 육식 동물처럼 씹어 먹었다.
상추와 김가루를 올린 비빔국수가 다음이었다. 고추장 비율이 높은 양념장 사이에는 다진 김치가 눈에 띄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젓가락을 국수에 푹 찔러 넣었다. 신맛을 강조하기보다는 단맛과 매운맛의 조화가 더 크게 느껴졌다. 고운 양념장의 질감이 국수 가락에 그대로 실려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성큼성큼 다가왔다.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매운맛 사이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 모든 맛이 서로 말을 걸고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그릇의 바닥이 보였을 때 모든 소리가 잦아들고 고요한 침묵이 깃들었다.
고향이 전라도 영광이라는 주인장은 수더분하게 국수를 비비고 육수를 국자로 퍼담으며 시간을 보냈다. 작은 가게 바깥으로는 어두운 공기가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 눈을 감으면 저 남도의 바다가 묵묵히 찰랑거리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가 더 이상 주방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동생과 나 모두 안다. 모두 모일 시간도 적고 강물을 들이마시듯 국수를 삼키던 아버지도 없다. 동생도 나도 때로 어머니에게 “비빔국수 생각이 난다”고 투정해보지만 그 말이 공중에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마실 물을 찾는 척하며 열어본 아버지 없는 집의 냉장고에는 우유와 빵, 오래 묵은 김치가 전부였다. 손끝을 저리게 하는 냉기가 발밑으로 흘러들었다.
#유진분식: 잔치국수 7000원, 비빔국수 7000원, (02)309-9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