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말러 교향곡 8번에 압도당했다. 지난 3일 저녁 잘츠부르크 축제 대극장은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를 간구하는 합창단의 호소로 가득 찼다. 솔리스트 8명과 베를린 방송합창단, 잘츠부르크 바흐합창단,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극장 어린이 합창단 등 3곳이 베를린 필과 함께 빚어낸 음악은 각별했다. 중동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폭력이 만연한 세상을 구원해달라는 기도처럼 엄숙하고 간절했다. 2000여 년 전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부활절 주간에 만난 최고의 순간이었다.
작년까지 독일 남부 휴양지 바덴바덴에서 축제를 차린 베를린 필이 올해 14년 만에 복귀한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를 찾았다. 20세기 전설적 지휘자의 대명사 카라얀은 1967년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부활절 페스티벌을 출범시켰다. 부활절 전후 열흘간 오페라와 합창,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여는 축제였다. 1955년부터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1957년 빈 국립오페라 예술감독까지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가 왜 축제를 시작했을까.
완벽주의자 카라얀의 ‘반지’ 4부작
카라얀은 완벽주의자였다. 빈 국립오페라의 관료주의와 재정 부족은 카라얀의 까다로운 요구를 채워주기엔 역부족이었다. 1964년 빈 국립오페라와 결별한 카라얀은 오페라를 만들 새 무대가 필요했다. 카라얀은 1967년 3월 19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바그너 ‘발퀴레’를 올리면서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을 시작했다. 베토벤 ‘장엄미사’와 브루크너 교향곡 8번 등 합창과 오케스트라 공연이 포함됐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은 1970년까지 ‘반지’ 4부작을 완주했다. 카라얀의 부활절 페스티벌은 바그너를 염두에 둔 이벤트였다.
1989년 카라얀 타계 후 베를린 필을 이어받은 아바도, 래틀에 이어 키릴 페트렌코(54)가 올해 처음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베를린 필은 2012년 잘츠부르크 축제를 마지막으로 바덴바덴으로 둥지를 옮겼다. 부활절 조직위의 횡령 사건이 몰고 온 여파였다. 2019년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임기를 시작한 페트렌코는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데뷔인 셈이다.
3월 27일부터 4월 6일까지 열린 축제에서 베를린 필은 오페라와 관현악·합창 등 카라얀이 세운 부활절 축제 프로그램의 틀을 따른 프로그램을 올렸다. 개·폐막작은 바그너 ‘반지’ 4부작 중 첫 번째인 ‘라인의 황금’이었다. ‘발퀴레’로 부활절 페스티벌을 시작한 카라얀의 전통을 계승한 셈이다. 베를린 필은 2030년까지 바그너 ‘반지’ 4부작을 매년 한편씩 올린다. 2028년은 쇤베르크 오페라 ‘모세와 아론’을 끼워 넣었다.
압도적인 페트렌코의 ‘라인의 황금’
축제 폐막일인 6일 지켜본 ‘라인의 황금’은 압도적이었다. 2시간 20분짜리 단막 오페라(악극)가 언제 끝났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바그너에 심취한 ‘바그너리안’도 아닌데 말이다. 러시아 출신 영화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반지를 차지하기 위해 신과 난쟁이, 거인이 다투는 싸움의 현장을 원시적인 날것 그대로 무대에 펼쳤다. 무대, 의상 디자인까지 맡은 그는 아이슬란드의 황량한 대지에서 촬영한 영상을 무대에 쏘아 신화적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옛 소련의 전설적 록가수 빅토르 최를 다룬 영화 ‘레토’와 ‘차이콥스키의 아내’ 등으로 칸 영화제 경쟁작에 잇달아 진출한 감독답게 신선한 연출이었다. 빈 국립오페라의 ‘파르지팔’(2021), 파리 오페라의 ‘로엔그린’(2023)으로 바그너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세레브렌니코프는 푸틴과 대립하면서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한 비판적 예술가다.
페트렌코의 베를린 필은 오케스트라의 실력을 100% 발휘한 장엄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베르디 오페라처럼 유명한 아리아나 중창은 없지만, 관현악이 주도하는 포효하는 음악은 바그너를 듣는 재미를 더했다. 페트렌코는 2시간 20분 동안 각 악기군과 솔리스트, 합창단까지 세밀하게 지시하면서 야전사령관처럼 꼿꼿이 지휘대를 지켰다.
주인공 보탄으로 데뷔한 바리톤 크리스티안 게르하허를 비롯, 브렌튼 라이언(로게), 리 멜로즈(알베리히)와 함께 ‘천둥의 신’ 도너로 나온 바리톤 김기훈의 활약이 돋보였다.
페트렌코는 2013~2015년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반지’ 4부작을 지휘했고 2018년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음악감독 시절에도 ‘반지’ 4부작을 올린 베테랑이다.
부활절 당일의 ‘천지창조’
다니엘 하딩이 지휘한 하이든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도 부활절에 어울리는 레퍼토리였다. 투간 소키예프는 재닌 얀센과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고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을 깔끔하게 지휘했다. 2010년부터 베를린 필을 지휘한 소키예프는 내년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지휘도 예정돼 있다.
이번 부활절 축제에서 페트렌코가 지휘한 말러 교향곡 8번(2회)과 ‘라인의 황금’(3회) 티켓은 일찌감치 동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축제 마지막날 달아오른 ‘라인의 황금’의 열기를 식히려고 잘자흐 강을 건너 미라벨 정원 근처 숙소까지 걸었다. 목련이 만개한 4월의 잘츠부르크에서 베를린 필과 함께 보낸 시간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