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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벌써 4분의 1이 지났다.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며 세웠던 원대한 계획들이 어느새 작심삼일로 끝났다고 자책하기엔 아직 이르다. 인류 역사에서 ‘진정한 새해’는 오랫동안 1월이 아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16세기까지 3월 25일을 새해 첫날로 삼았다. 이로 인한 혼란을 정리한 인물이 샤를 9세다. 그는 1564년 ‘루시용 칙령’을 선포하며 새해 시작을 1월 1일로 통일했다. 그렇다면 그전까지는 왜 3월이었을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성모 영보(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를 알린 것)와 부활절이 맞물린 ‘생명의 시작’이었기 때문이지만, 그 뿌리를 더 깊이 파고들면 유럽 문화의 근간인 고대 그리스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와 이어진다.

디오니소스는 ‘두 번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제우스는 인간 세멜레와 사랑에 빠졌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유모로 변신해 “당신의 연인이 정말 신이 맞느냐”며 교묘한 의구심을 세멜레에게 심었다. 불안해진 세멜레는 본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문제는 그의 본모습이 강렬한 번개를 동반한다는 것. 번개 불꽃에 타 죽은 세멜레는 홀몸이 아니었다. 제우스는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넣고 남은 기간을 키워 탄생시켰다. 이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다.

포도 재배 방식은 이 신화와 놀라운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포도는 씨앗을 뿌려 재배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새로운 꽃가루가 날아와 수정을 해 형질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종류의 포도나무 줄기를 잘라 튼튼한 나무에 붙이는 ‘접붙이기(Grafting)’ 방식으로 진행된다. 세멜레의 배에서 디오니소스를 꺼내 제우스의 허벅지에 넣는 건 접붙이기와 닮아 있다. 유사한 맥락은 성경에도 있다. 요한복음 15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부분이다. 훌륭한 나무에 붙은 가지만이 좋은 열매를 맺듯 신의 생명력에 의지해 결실을 보려 했던 고대인들의 염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러한 코드는 이집트 농경과 부활, 그리고 와인의 신으로 이어지는 오시리스(Osiris)와도 이어진다.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살아난 오시리스는 파라오들이 영원한 생명과 통치의 정통성을 얻기 위해 닮고자 했던 신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가 부활해 대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봄이 오면 식물의 싹을 상징하는 초록색으로 오시리스 신상(神像)을 칠하며 축제를 벌였다. 헤로도토스는 ‘오시리스가 그리스로 건너와 디오니소스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부활의 서사는 고대 아테네의 봄 신년 축제 ‘안테스테리아(Anthesteria)’에서 절정을 이룬다. 꽃(Anthos)에서 유래한 이 축제는 매년 3월, 와인의 신을 맞이하는 의식이었다. 고대인들은 이 시기에 햇와인 항아리를 처음 개봉하며 축배를 들었다.

이러한 봄에 주목받는 와인이 바로 로제 와인이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의 중간 형태로 밝은 핑크빛을 한 로제 와인의 색은 마치 봄에 피어나는 꽃과 같은 이미지를 준다. 그래서 한 해 중 로제 와인의 매출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시기가 이맘때다. 페어링되는 음식도 봄철 제철 식재료다. 대표적으로 아스파라거스나 아티초크, 그리고 부활절의 어린 양고기와 로제 와인의 조화는 미식가들이 1년을 기다려온 봄의 의식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프랑스 증류주 코냑에도 이맘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점이다. 코냑은 법적으로 3월 31일까지 모든 증류를 마쳐야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4월 1일을 기점으로 오크통 숙성 연도인 ‘콩트(Compte)’가 시작된다. 아무리 일찍 증류해 통에 넣었어도 4월이 돼야 비로소 한 살을 먹는 셈이다. 3월에 술의 문을 열고 4월부터 진정한 숙성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결국 진정한 시작은 봄부터라는 것과 이어진다.

우리의 음력설 또한 입춘(立春)과 맞물린 실질적인 봄의 시작이었으니, 동서양 모두에 이 시기는 생명력의 관성이 작용하는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2026년의 첫 다짐이 흔들리고 있다면, 이제 막 숙성을 시작하는 코냑처럼 스스로를 다시 정립해보면 어떨까. 죽음 같은 겨울을 견디고 부활한 포도나무처럼, 다시 시작할 ‘봄의 신년’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으니 말이다. 화사하게 핀 봄꽃 아래에서 꽃향기 그윽한 로제 와인을 홀짝여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