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결혼 13년 차 부부입니다. 남편은 퇴근 후에도 휴대전화로 회사 메신저를 확인하고, 주말에도 업무 전화를 받습니다. 저는 대화가 하고 싶어 말을 걸지만, 남편은 피곤하다며 대답을 피하거나 짜증을 냅니다. 아이 문제나 생활비 같은 구체적인 얘기를 꺼내면 “알아서 해”라는 말만 돌아옵니다. 대화를 시도할수록 남편은 집에서조차 쉴 수 없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저는 고립돼 가는 것 같습니다.
A. 남편은 평일 퇴근 후는 물론 주말에도 업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아내는 아이 문제와 생활비 등 남편과 함께 의논할 과제가 쌓여 있습니다. 둘 다 지친 상태에서 여유는 사라지고 작은 자극에도 쉽게 날카로워집니다. 고단한 일상과 반복되는 갈등 속에 결혼 생활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 이런 상황에 이르렀을까요?
우선 이 부부가 각자 맡은 역할을 살펴봐야 합니다. 남편은 ‘집(house)’이라는 토대를 닦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그의 헌신은 경제적 안정과 안락함을 선사하지만 밤낮없이 일에 묻혀 지내느라 휴식과 여유는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반면 아내는 따뜻한 ‘가정(home)’을 가꾸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일상의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책임을 다합니다. 이처럼 남편은 튼튼한 집을 마련하고, 아내는 안정된 가정을 만들기 위해 각자 자리에서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집과 가정은 가족이 성장하고 생활할 필수 공간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집이 쉬는 공간이길 원하고, 아내는 대화를 나누며 함께하는 가정을 꿈꾸고 있습니다. 서로의 바람을 채워주기에는 부부가 너무 지쳐 있습니다. 여유가 사라진 자리에는 비난과 짜증이 앞섭니다. 부부가 갈등하며 연합하지 못할 때 공들여 세운 집과 가정은 무너지게 됩니다. 서로에게 힘이 돼주기는커녕 각자 하는 일의 가치마저 떨어뜨립니다. 이럴 때 부부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돈 버는 기계 같아!” “나는 파출부로 살아가고 있어!” 이런 말은 서로를 더 아프게 할 뿐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하는 일은 동일하게 소중합니다. 각자 최선을 다하더라도 배우자가 이를 인정해 줄 때 진정으로 자기 일의 가치는 높아집니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중한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타샤 유리치는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더라도 타인의 긍정적인 시선과 지지가 더해질 때 인간은 성장하고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혼자서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충분히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 부부는 배우자의 지지와 공감이 없어 지쳐가고 있습니다. 자신은 물론 배우자가 노력한 결과마저 가치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부의 대화 방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대화를 피하고 짜증을 낸다고 했습니다. 지쳐 있는 남편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아내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자극’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곤하다”고 말하는 남편은 얼굴에 짜증이 서려 있고 몸은 회피하는 태도처럼 보입니다. 이때 남편의 “피곤하다”는 말은 더 이상 아내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대화에서 의도와 내용보다는 태도와 행동이 먼저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즉 남편은 피곤함을 전하고 싶지만 회피하고 짜증 섞인 행동이 아내를 자극합니다. 아내는 “내 얘기를 한 번이라도 들어준 적이 있어?”라며 불평을 쏟아내게 됩니다. 그러면 아내의 ‘대화하고 싶은 의도’보다 ‘공격적 태도’가 남편 눈에 먼저 들어옵니다. 결국 부부는 서로 곱지 않은 말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갈등이 깊을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집니다. 아내는 혼자 사는 듯한 외로움을 느끼고 남편은 집에서도 쉬지 못한다고 불만을 터뜨리게 됩니다. 냉랭한 기운이 지배한 가정은 서로에게 피로감만 더합니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 노출된 아이들은 계속해서 상처를 받습니다.
아내가 느끼는 고립감이 사라지고 남편에게 집이 쉬는 공간이 되려면, 서로를 공격하거나 피하지 말고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를 부모가 기쁘게 맞이하며 안아주듯이 부부 사이에도 서로를 향한 따뜻한 환대가 필요합니다. 캐나다 심리학자 수잔 존슨 교수는 부부가 사랑이 지속되고 관계가 생기를 유지하려면 ‘만남 의식’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저녁에 만나서 서로를 위로하고 지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부부가 에너지를 공급받으며 이것이 진정한 휴식과 쉼이라고 강조합니다. 외벌이 가정이라면 남편은 아내의 집안일과 육아에, 아내는 남편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서로의 마음을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맞벌이 부부 역시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밖에서 지치고 힘든 마음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상대에게 먼저 다가갈 때 고단함이 진심으로 공유되고 위로받습니다. 존슨 교수는 이때 ‘안식의 시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부가 힘든 부분을 공유하고 서로를 의지할 때, 역설적으로 의지하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내 편이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 스스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잠들기 전 잠깐이어도 도움이 됩니다.
애착이론을 만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존 보울비 박사는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상담을 의뢰한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집 짓기 위해 쏟은 노력을 아내에게 인정받길 원하고, 아내는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남편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서로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 결핍을 채워줄 때, 비로소 부부는 단단한 정서적 연대로 묶입니다. 그 안에서 부부는 각자의 갈증을 해소하고, 자녀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