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나프타 수급 차질과 관련해 쓰레기 종량제 봉투 사재기를 막기 위해 1인당 구매량 제한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일 서울 한 대형 마트에서 고객이 종량제 봉투를 구입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말 서울의 한 마트. 중년 여성 A씨가 20L(리터)짜리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여러 묶음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하자 다른 고객 B씨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재기 좀 하지 맙시다. ‘재고 충분하다’는 구청 공지 안 봤어요?”

사람들 시선이 쏠리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A는 “우리 집은 원래 봉투를 많이 쓴다. 강아지 배변 패드에 양가 부모님도 기저귀를 쓰셔서 사다 드리려는 것”이라고 발끈했다. B가 “어제도 가게마다 돌며 100장 사는 사람을 봤다. 이러니 당장 필요한 사람들이 못 사지 않느냐”고 하자, A는 “난 평소보다 좀 일찍 사러 온 것뿐이지 사재기가 아니다”라고 맞섰다.

중동 전쟁으로 석유화학 기초 원료인 나프타 공급이 불안해지자 종량제 봉투 대란이 이어지고 있다. 나프타는 에틸렌·폴리에틸렌으로 만드는 비닐·플라스틱 포장재와 배터리, 합성섬유 등 소비재 전반의 원료.

그런데 품귀 현상이 유독 쓰레기봉투에 집중되고 있다. 3월 21~27일 종량제 봉투는 일평균 270만장씩 팔려 평년 대비 5배나 많았다. 왜 하필 쓰레기봉투인지, 그리고 다음 ‘대란템’은 무엇일지 살펴봤다.

이성에 호소해도 안 듣는 비닐 사재기

중동 전쟁 장기화로 인해 비닐·플라스틱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등 석유화학 제품 수급이 불안정해지고 있다.최근 경기 광주시 플라스틱 공장의 모습./뉴스1

이번에 쓰레기봉투 대란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가 “반년 간 버틸 물량이 있다” “가격 인상 계획이 없다”고 하는데 왜 못 믿느냐는 것이다. 사재기하는 이들은 “봉투가 부족해져 가격이 오를까 봐”라고 한다. 하지만 봉투 값은 지자체가 조례로 정하고 납품업체와 장기 계약하기 때문에, 원료 가격이 올라도 당장 소매가가 오르지는 않는다.

종량제 봉투 가격은 제조 비용이라기보단 쓰레기 수거를 위한 행정 서비스 비용이다. 1995년 쓰레기 종량제가 도입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비상시라면 수거·과금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설사 정부가 종량제 봉투에 담긴 쓰레기만 거둬간다고 고집하더라도, 개인이 사재기한 물량을 되팔 수 없을뿐더러 만약 그랬다간 과태료를 물게 된다. 이미 일반 봉투에 유료 스티커 부착식으로 바꾼 지자체, “곧 봉투 값을 내릴 테니 미리 사지 마라”는 지자체도 나왔다.

그런데도 현장에선 조용한 사재기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공급에 문제가 없는데도 사재기로 일시적 품귀가 일고, ‘매대가 텅 비었더라’는 소문과 군중 심리가 또 사재기를 일으킨다.

최근 생활잡화점 다이소의 한 서울 소재 매장에서 김장봉투 비닐백 비닐장갑 등 비닐 관련 제품이 사재기로 동난 모습. /독자 제공

30대 회사원 유모씨는 “상점에 과자를 사러 갔다가 사람들이 종량제 봉투는 물론 김장봉투와 비닐백·지퍼락·비닐장갑·물티슈까지 쓸어가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홀린 듯 봉투와 비닐백을 샀다”며 “사람들이 ‘정부 믿고 안 산 사람만 바보 된다’ ‘비닐봉지가 나중엔 명품백 될 것’이라 하더라”고 말했다.

간호사 김모씨도 “어머니가 ‘1인당 구매 제한에 걸려 충분히 못 산다’며 딸·사위에게도 봉투를 매일 사두라고 채근해 황당했다”면서도 “썩는 것도 아니니 조금 더 사놓긴 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비상사태라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건 물론 약탈도 일어날 법한데, 착한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종량제 봉투를 미리 사놓다니 놀랍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쓰레기봉투 광풍의 진짜 이유가 뭘까. 우선 과거 각종 비상사태 때 ‘생필품 품귀로 고생한 기억’ ‘미리 못 사서 손해 본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 주부 이모씨는 “6년 전 코로나 사태 초기 마스크를 미리 사두지 않아서 나중에 비싼 가격에 요일제로 어렵게 구한 게 생각나, 이번엔 종량제 봉투를 평소보다 두 배 더 사놨다”고 말했다.

코로나 휴지처럼… ‘위생이 곧 존엄’

지난 2023년 천일염 대란 당시 서울의 한 대형 마트에서 소금이 동난 모습. 이상 기후로 인한 천일염 생산 차질에 일본의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방류 이슈가 겹치며 천일염 가격이 폭등했다./뉴스1

2022년 겨울 코로나 재유행 땐 “중국인들이 입국해 한국 감기약을 수백만원어치씩 쓸어간다”는 소문이 돌며 감기약 대란이 벌어졌다.

2023년엔 이상 기후에 따른 천일염 생산 차질에 일본 오염수 방류 괴담이 겹쳐 소금 대란이 일었다. 중간 도매상의 사재기로 천일염 가격이 폭등하자, 소금 해외 직구에 생선·미역·참치캔 등 ‘바다 사재기’로 번졌다. 쓰레기봉투는 이 같은 ‘외국발 비상사태가 내 일상을 무너뜨린다’는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다.

행동 경제학에선 사재기, 패닉 바잉(panic buying)을 ‘통제 욕구’로 본다. 자연재해나 전염병·전쟁 등 통제 불가능한 극적인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나름의 극단적 행위로 응수한다고 한다. 실제 생산·유통망에 문제가 없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위기에 준비됐다’는 심리적 안정을 위해 대량 쇼핑에 나선다는 것이다.

생존이 목적이라면 식량과 생수, 약품과 연료를 골고루 비축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특히 최근엔 사재기 광풍이 위생용품에 쏠리는 경우가 많다. 선진국일수록 그렇다.

2020년 코로나 초기 미국과 유럽·일본 등에서 벌어진 두루마리 휴지 사재기가 대표적이다. 당시 여러 해석이 나왔다. ‘집에 갇혀 있으니 휴지를 많이 써서’ ‘더러운 바이러스를 닦아내고 싶은 심리’ ‘쟁여두면 비용 대비 만족감이 커서’ ‘휴지 매대가 비는 순간 시각적 충격이 커 공포가 쉽게 전염되기 때문’ 등이었다. 앞서 1973년 오일쇼크 때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도 사태의 원인과는 무관하게 휴지 품귀가 빚어졌다.

2020년 코로나 당시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휴지 대란이 일어났다. 당시 캐나다 한 대형마트의 모습. 이처럼 위기 때 식량보다도 위생 관련 용품이 먼저 대란이 일어나는 것을 '역겨움 요인(yuck factor)'으로 설명하는 해석이 있다. /CBC

영국 심리학자인 스티븐 테일러는 책 ‘팬데믹의 심리학’에서 이를 사재기의 ‘역겨움 요인(yuck factor)’으로 설명한다. ‘위생이 곧 존엄’인 현대 문명인에게 비상 사태 시 당장의 굶주림보다도 배설물·쓰레기·악취·병균 등 넘쳐나는 오물에 대한 상상, 그로 인해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장면이 더 큰 공포를 안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내 일상을 오염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가장 싸고 작은 물품은 종량제 봉투다. 실제 생존 매뉴얼에서도 대형 비닐봉지는 위급 시 물이나 공기를 모아두거나 방수, 방한, 배설물 처리에 유용한 필수품으로 꼽힌다. 쓰레기봉투는 단순한 행정 물품이 아니라 상상 속 불안을 잠재우는 심리적 요새인 셈이다.

고환율·돈 풀기에 “오늘이 제일 싸다?”

역대 패닉 바잉은 실제 공급망 붕괴보다는 다른 소비자에 대한 불신으로 촉발된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남들도 적당한 주기로 적당한 양을 구매할 것이란 믿음이 깨지는 순간 너도나도 사재기에 올라탄다는 것이다.

그 방아쇠는 단 몇 명이 ‘혹시 모르니 조금만 더’ 사둘 때 당겨진다. 글로벌 마켓 리서치 그룹 칸타가 영국 소비자 10만명을 조사했더니 세정제는 판매량이 6%, 파스타 면은 단 3%만 늘어도 집단 사재기를 자극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장품 용기의 핵심 원자재인 나프타 가격의 변동성이 커지자, 중소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생산 중단과 단가 인상 공지가 이어지면서 K뷰티 수출 시장에도 비상이 걸렸다. 최근 서울의 한 화장품 매장. /뉴스1

종량제 봉투 문제는 대응이 쉬울지 모른다. 문제는 나프타 대란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똥이 됐다는 점이다. 벌써 비닐·플라스틱 제품은 물론 기저귀·생리대 사재기가 벌어지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스티로폼 회 접시, 일회용 커피 컵, 배달 그릇과 포장 봉투 등을 수만 개씩 사들이고, 농가에서도 농업용 비닐을 수년 치 쟁여둔다고 한다.

세제·치약·화장품도 포장 용기 부족으로 비싸질 것이라며 사재기하는 이들이 있다. 2021년 대란이 일었던 요소수 역시 현재 중국산 원료 수입엔 문제없는데도 ‘요소수 말통’이 부족하다며 가격이 들썩이고 있다.

취미로 피규어를 만드는 한 20대 남성은 “달러 환율이 1500원이 넘었는데 나프타 사태로 부품 값이 더 오를 것 같아 수십만원어치를 해외 직구했다. ‘대체품이 갈 수도 있다’는데, 어쨌든 오늘이 제일 싼 것 같아 결제부터 했다”고 했다. 합성섬유가 들어가는 가구,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나프타 수급 불안으로 건설 현장에서도 자재 가격 인상과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1일 경기 안양시의 한 레미콘 공장에 믹서트럭들이 주차돼 있다./뉴스1

인테리어 업체들은 최근 페인트 가격이 오르자 “타일·콘크리트 등 건축 자재가 다 오른다”며 계약을 앞당길 것을 유도하거나 미리 공사비를 올린다고 한다. 부동산 업계에선 “아파트 재건축도 줄줄이 좌초될 것” “분양가가 더 비싸질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고환율에 나프타 대란, 지방선거용 ‘전쟁 추경’ 같은 돈 풀기가 겹친 상황”이라며 “이는 ‘더 비싸지기 전에 사놓자’는 사재기 심리를 자극해 물가를 실제보다 더 밀어 올리는 ‘기대 인플레이션’으로 폭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