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러 갔다가 번따(전화번호 받기) 당했어요.”
대형 서점이 요즘 미혼 남녀 사이에서 뜻밖의 ‘만남의 장소’가 되고 있다. 일부 커뮤니티와 SNS에서 ‘교보문고가 번따 성지’라며 노하우와 팁을 공유하는 글이 번지면서다. 일각에서는 “번따 성공할 때까지 매일 가봤더니” 같은 콘텐츠가 계속 생산되며 일종의 놀이나 챌린지처럼 번지는 모양새다.
외로운 그대, 서점으로 가라
왜 하필 서점일까. 서점은 상대의 성향을 파악하기 좋은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지곤 한다. 연애 심리 전문가들의 조언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주말 오후 4시에 가라.’ 이 시간대에 한가한 사람은 솔로일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또 집에서 널브러져 있기 쉬운 주말 오후에 서점을 찾는 사람이라면 진취적이고 부지런한 성격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 대신 독서로 지식을 탐구하는 지적이고 건실한 사람일 공산이 높다.
다른 전문가의 조언이다. ‘남자라면 베스트셀러와 소설·시·에세이 코너를, 여자라면 경제·경영 코너를 공략하라.’ 확률적으로 소설·에세이 코너에 젊고 트렌디한 여성이, 경제·경영 코너에는 건설적이고 똑똑한 남성이 많을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다. 다소 편견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일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서점에서 머무는 코너가 달라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서점 공략법’이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방식은 아니다. 주부 박모(40)씨는 “10년 전에도 로펌 변호사들이 교보문고에서 자기 명함을 쓱 내밀며 번호를 물어보곤 했었다”며 “광화문 직장인이었던 나도 한두 번 번따를 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서점이 ‘번따’ 장소로 활용되는 것은, 서점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유의 신뢰감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서점을 자주 찾는다는 대학원생 홍모(26)씨는 “술집이나 클럽이 아니라 서점에서 연락처를 물어온다면 경계심이 좀 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를 보면 취향이 나와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몰입의 시간을 지켜주세요”
이런 현상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속삭이거나, 계속 관찰하면서 주위를 맴도는 게 공포감과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서점에 머무는 동안 계속 눈에 띄어서 혹시나 했는데 지하철역까지 쫓아와 연락처를 물어 소름 끼쳤다’거나 ‘정중하게 번호 요청을 거절했는데 곧장 주변의 다른 여성에게 번따를 시도해 황당했다’는 증언도 이어진다.
최근 ‘번따’와 관련한 불편 신고가 잇따르자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소중한 독서의 순간이 낯선 대화나 시선으로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해달라’는 내용의 안내문을 비치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서점 곳곳에 직원들이 많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이용에 불편한 경우가 있으면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텍스트힙’ ‘독파민(독서+도파민)’ 열풍 속에 책을 읽는 젊은 층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격년으로 실시하는 국민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연간 독서량은 2013년부터 계속 하락해 지난해 처음으로 40% 아래(38.5%)로 떨어졌다. 하지만 20대만 유일하게 직전 조사보다 독서율이 증가(74.5%→75.3%)했다.
온갖 자극적 영상의 홍수 속에서 ‘디지털 디톡스’에 대한 소구가 높아졌고, 젊은 층 사이에서 종이와 책을 가까이하는 게 오히려 힙해진 것이다. 책을 읽고, 좋은 문장을 필사하고, 독서 인증 사진을 SNS에 공유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처럼 젊은 층의 독서율이 올라간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독서 본연의 가치보다 사교 활동 같은 부가적 목적에 관심을 두는 이들도 상당수다. 여러 사람이 함께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이 많이 늘어났는데, 여기에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염두에 두고 참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녀 관계에도 효율성과 경제성, 파편화된 취향을 따지는 MZ세대의 관계 형성 방식이 드러나는 현장인 셈이다.